참회(懺悔)
얼마 전 어느 중앙 일간지에 “내 아버지는 성자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라는 안경선 목사의 글이 실렸다. 여수 애양원에 있는 손양원 목사님과 두 아들의 묘비 앞에 서 있는 사진과 함께‘영화 같은 가족사’를 털어놓은 것이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麗順叛亂)사건으로 여수와 순천 지역이 남노당 세력의 공산군에 장악 되었을 때 순천중학교 뒤뜰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신(東印)과 동인(東信) 형제가 순교 당했다. 며칠 후 국군이 진주하여 공산군을 진압하고 반란에 가담한 학생들을 처형하게 되었을 때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쏴 죽인 안재선을 구해 내고 자기의 양아들을 삼았다. 2년 후 6.25가 일어났고 애양원을 지키던 손양원 목사님도 공산군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손목사님에 의해서 목숨을 구한 안재선은 목사님의 장례식 때 맏상주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목사님의 유지를 따라 신학교를 가고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 자’라는 주홍글씨의 사슬에 매여 고통 속에 살다가 48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사람의 아들이 안경선 목사다. 안경선은 고등학교 2학년때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원자탄’을 관람했다. 영화에서 목사님의 두 아들이 순교하는 장면과 그들을 죽인 학생을 양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그때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을 했다. 그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인 서울 기독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여러 곳에서 목회를 해 왔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손양원과 안재선이라는 두 이름이 교차 되면서 갈등의 늪으로 빠져 들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아버지는 성자의 두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목을 조여오는 것 같은 답답함 속에 살았다. 그가 지난달 초 애양원을 방문하고 삼부자의 묘소를 찾은 것은 이처럼 피를 말리는 자기와의 싸움을 극복했다는 뜻일 것이다. 못다 풀고 간 아버지 안재선의 고통, 그 사실을 알고부터 20년의 세월을 마음고생으로 지새웠던 숙명적인 멍에를 내려놓는 첫 발걸음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부딪쳐야 되고 눈물을 흘려야 되는 참회의 장면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첩경임을 실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