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식성이 까다로운 사람은 입에 맞는 음식만 골라서 편식을 하게 되므로 건강의 균형을 잃기가 쉽다. 대체로 잡식 동물처럼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은 건강뿐만 아니라 성격도 모가 나지 않아서 대인관계가 부드러워진다. 언젠가 교역자들을 데리고 음식점에 간적이 있었다. 소문난 삼계탕 집에 갔는데 손님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사람 숫자대로 삼계탕이 나왔는데 그중 한사람이 닭을 먹지 못한다고 했다. 누군가 ‘오늘 이 자리에서 입문을 하면 되겠네.’하고 억지로라도 먹으라고 권했다. 그 사람은 수저를 잡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급기야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집에서 전복죽을 시켜다 먹게 한 일이 있었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은 다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유독 나 혼자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만큼 사고의 폭이나 행동의 반경이 좁아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선시대 말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지나친 자기 과신에서 독선적인 노선을 고집했거나, 그와 반대로 막연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외세의 유입을 차단했을 수도 있다. 무작정 문을 열고 무엇이나 다 받아들인다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자기 기준의 가치 척도에 따라 선택적 수용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나와 성향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거부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이해하려고 들면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의 필요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많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가지면 된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3).”고 한 사도 바울의 당부를 귀담아 들으면서 새해에는 우리 모두 열린 마음으로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