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멀린 2011.02.28 10:58:29
1978

 

 

왜 울었을까?

 


  <이런 외적인 부분이 다가 아닌 가정입니다. 열 명의 식구가 사는 집에 가면서 웬만하면 호텔에 가서 자야지 ...... 하는 마음으로 갔어요. 시끄러운 것이 가끔은 거슬리더라구요. 그런데 도무지 호텔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정 분위기가 너무 좋았거든요. 방안에서 도우미와 여덟 명의 아이들이 섞여 자면서 투덜대지 않고 오히려 큰 딸은 도우미 언니들과 자게 되면 잠이 더 잘 온다고 그 방으로 간답니다. 성격들이 다 둥글둥글 ...... 어떤 상황에도 적응을 잘 하는 아이들이 정말 사랑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잣대에 너무 의식하며 살아온 내가 정말 작아보였습니다. 물론 각자의 길과 그릇이 다르다지만 너무 좁게 살아왔구나! 생각되어지더라구요. 또 그 목사님 그렇게 되기까지 특별한 경험들, 하나님의 만지심들을 거치면서 얻어진 결과들이겠지요. 아마도 우리라면 기절을 해도 몇 번은 했을 것이고, 도망을 가도 몇 번은 갔을 것입니다. 그 사모님도 그런 별난 남편 만나서 잘 인내하며 소리 없이 밝게 보필하는 것을 보면서 어느새 내가 오늘 부엌에서도 그 사모님의 알뜰한 행동들을 따라하고 있더라구요 ...... >

 

  편지 초두에 언급한대로 필리핀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울었다는 이유이다. 왜 그토록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숨 막히는 감정을 느끼며 진정이 안 되었던지 그 내용의 설명이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필리핀에 사는 그 선교사 부부가 하노이에 왔다가 자기 집에 돌아가서 엉엉 울었다면 말이 된다. 배가 다른 아이들, 혈통과 인종이 각각인 여덟 명의 아이들 속에서 정신없이 살고 있는 그들이 하노이에 있는 평강과 나실만의 공간을 보고 거기에 비교되는 자기의 처지를 한탄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 거꾸로 되어버린 나실의 고백을 들으면서 천국의 향기가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에서 풍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없이 예수님과 몸으로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서 묻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