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힘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데(신 15:4,11), 율법서나 예언서에서는 착취당하는 자를 지칭합니다(출 23:6; 암 2:6). 또한 지혜서적에서는 물질적으로 곤궁함을 당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잠 31:20). 구약 성경에서는 원래 부요함을 축복으로, 가난을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로 생각했지만 바벨론 포로 생활을 지나면서 부는 예언자들의 심판 선언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를 착취하였고 그들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부는 타인의 가난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며 그들과 소유를 나누는 것에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프토코스’라는 형용사는 구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대 빈곤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고대 희랍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제도가 없었는데, 이에 반해 신약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내세에 있을 잔치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더불어 초대받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셨고(눅 14:21),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작은 물질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2:41). 나아가 부자에게는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을 요구하셨는데(마 10:17), 이는 세상에 집착할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금욕적인 이유만으로 부를 경멸하시고 가난을 권면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들을 향한 참된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