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운명체
삼라만상이 공존하는 자연계에서 외모나 성격이 전혀 다른 객체가 서로 어울리며 조화롭게 상부상조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이런 경우 서로가 상대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자기의 부족분을 그쪽에서 채우며 상생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나 문화를 되돌아 볼 때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가 다 이런 원리에서 유지되며 발전을 거듭해 나왔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최근 어느 잡지에서 <바위와 나무>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참으로 효과적인 자연의 공생관계를 묘사 한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해변의 절벽과 바위들은 오랜 풍화 작용을 견디다 못해 쩍쩍 갈라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바위 틈새에서 파란 싹이 돋아났다. 바위 : 넓고 넓은 세상을 놔두고 왜 하필 내게로 온 거니? 바위 : 나를 안 만났으면 너는 정말 멋있는 나무가 되었을 텐데. 바위 : 이제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 너를 만난 뒤에서야 기쁨이 뭔지 알았어. 나무 : 나도 다른 나무처럼 멋있고 우람하게 클 수는 없었지만 그런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와 함께 한 세월은 나에게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었으니까. 그날 밤 푹풍우가 몰아쳤다. 이윽고 바위는 절벽에서 뚝 떨어져 아래 바다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나무는 바위를 꼭 끌어안고 운명을 같이했다. 피할 수 없는 숙명 이었다고나 할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실 때 이미 공동운명체는 시작되었다. 기본단위인 부부의 관계에서 부터 가족 공동체,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로 발전 하게 되지만 어느 경우이든지 자기만의 욕심을 위해서 선택 할 수도 없고 행동 할 수도 없는 공동운명체가 되고 만 것이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네 탓 내 탓을 하기보다 그 속에서 정을 들이고 그와 함께 보람을 찾으며 즐거움을 이끌어 내는 것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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