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보다 나은 자
정말 자기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서 그럴까?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며 느끼는 심정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중에 ‘평생 동안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도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고 의아해 본다. 어떤 목사님의 ‘나는 성령을 받고 거듭난 이후로 절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설교를 들을 때도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다. 나로 말한다면 이런 것은 희망사항 일뿐 실천사항이 못되기 때문이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드나드는 것처럼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나와의 싸움에서 항상 밀리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아직도 미완성 단계에서 점차 예수님을 닮아 가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상태 일뿐 더 큰 진전은 없지만 아마 죽는 날까지 이 싸움은 계속해 나갈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잘 아는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글을 받았다. 학교에서 어떤 제자가 ‘소녀처럼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하고 친근하게 문자를 보내 왔더라는 것이다. 이 글을 받고 자신은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 나이 몇 살인데 딸 같은 어린 학생의 눈에 소녀처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처신이 비현실적이었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내속에는 여러 가지 가슴앓이와 스트레스를 잔뜩 안고 살아가는데 아이들의 눈에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였다면 그만큼 자신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겉과 속이 같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 표리부동(表裏不動)의 위선적 삶을 살아야 되는가 하는 문제로 갈등한다고 하였다. 아마 이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 볼 때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자기의 관리나 책임의식이 투철하여 그냥 덕담으로 받아 넘길 말이라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것으로 자기를 다그치곤 하는 것 같았다. 그 선생님은 교단에서 지식이나 이론만으로 제자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성실한 자기의 삶을 통해서 인격적인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항상 자기성찰에 매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줄 안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윤리적 가치관이 이렇다고 볼 때 성도들의 영혼을 관리하는 목회자의 도덕성이나 책임 의식은 훨씬 높아야 되고 비중 있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설교자로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 일치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나는 죄를 안 짖는다’고 자신하는 사람이야 상관없겠지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일 경우 누구라고 이런 일에 예외가 되겠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힘 있게 복음을 전하고 변화된 삶의 방법까지 제시해 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길들이지 못하는 무력함에 자책을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옛날 솔로몬 왕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나으니라”고 말을 한 것을 보면 그분도 자기를 다스리는 일에 많이 고민 했던 것 같다. 우리가 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말과 행동의 간극을 좁혀 나가도록 꾸준히 자기를 훈련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일에 성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용사 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