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향(北向)집의 사연
남쪽의 항구 도시인 마산에 가면 뒤쪽으로 무학산(舞鶴山)이 큰 산맥을 이루어 도시를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가고파’의 고장답게 아름다운 합포 만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동서로 길게 뻗은 도시의 복판에는 노산(李 殷相)선생이 어린 시절에 놀았다는 제비산이 있는데 바로 그 산자락에 바다를 뒤로하고 산꼭대기를 쳐다보며 북향으로 지어진 집이 있었다. 그 집 근처를 지나는 사람마다 누가 왜 저런 집을 지었을까 의아해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의 집은 전망도 좋지 못할 뿐 아니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우리 환경에는 전혀 맞지 않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그 집을 지은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에서 온 외국인 선교사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적도를 중심으로 우리나라는 북위30-40도 지점에 위치하여 있지만 그 나라는 우리와 달리 남쪽으로 20-40도 지점이기 때문에 방위의 감각이나 생활 습관 까지 정반대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1889년 호주 선교부로부터 파송 받아 서울에 도착한 헨리 데이비스(J.H. Davis)목사와 그의 자매인 메리 데이비스(Marry Davis)는 우선 경남 지방을 선교지로 정하고 길을 떠났다. 부산까지 멀고 험한 길을 걸어오는 동안 데이비스 목사는 겹친 피로에 천연두와 폐렴을 앓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명의 나라인 조국을 마다하고 복음을 위하여 미개하고 거친 나라 한국에 까지 왔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데이비스 목사의 갑작스런 죽음의 소식에 접한 호주 장로교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기로 한국선교에 새로운 불씨를 던져 주었다. 본국에서 데이비스 목사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자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1891년 맥케이(J.H.Mackey)목사 부부와 함께 3명의 여성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처럼 초기 한국선교의 열정에 쏟은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부산·경남지역의 복음화와 새로운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부산의 일신학교와 마산의 창신, 의신여학교를 비롯하여 거창과 창녕 등지에 미션스쿨을 설립하였고 부산진 교회나 문창교회처럼 오늘날 12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전통적인 북향주택 문화의 사람들이 남향(南向)문화의 배타적이고 척박한 토양에서 눈물의 씨를 뿌리고 가꾸었던 결실인 것이다. 데이비스 목사의 희생은 오늘날 이처럼 부흥된 한국교회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었음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