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08.07.20 18: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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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진(金禮鎭) 목사님

 

    얼마 전 <만세반석> 편집장인 최선혜집사가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이번호부터 매회 연재할 기획물로 순교자에 관한 글을 싣고 싶은데 원고청탁을 할 만한 분이 없는지 추천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당장 후배요, 친구인 이상규 교수가 생각났다. 그분은 한국교회 역사를 전공하였고 지금은 고신대학교 교회사 교수이며 고신역사 박물관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교수는 한국교회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고 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기에 몇 회로 연재할만한 글을 부탁하기는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최 편집장은 우리교회 초대 교역자요, 순교자이신 김예진목사님에 관한 글을 첫 회에 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첫말에 그건 나도 희망하는 일이지만 참으로 곤란할 것 같다고 했다. 김예진목사님으로 말하자면 1946년 4월 이후 후암교회 설립을 주도하신 초대교역자인데 애석하게도 우리교회에는 그분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다. 1981년에 출판된 후암교회 35년사’에는 설립 초기에 김목사님을 모셨던 몇몇 분의 증언과 또 가까운 친지와 가족들의 입으로 전해진 내용을 수록해 놓았으나 목사님의 설교문이나 사진과 같은 직접적인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원로장로님실 벽면에는 역대 담임목사님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김예진목사님의 경우 그것마저 손으로 그린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상규 교수가 보내온 자료에는 김예진 목사님의 귀한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한 장은 38년에 찍은 가족사진이고, 또 한 장은 45년 해방되던 해 찍은 사진인데 목사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가 있다. 이번호 <만세반석>에 실리는 이 글에는 김예진 목사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 등 교육과정과 또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애국지사로서의 역할도 소개되어있다. 1950년 6.25 동란이후 수도 서울이 적 치하에 들어갔을 때 목사님은 피난을 가시지 않고 서울에 머물다가 공산당에 의해서 순교하신 내용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1962년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목사님의 독립운동과 애국적인 공적을 인정하고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묘비를 세웠다. 이교수의 글에 “김예진목사는 평소 ‘삶은 조국에, 죽음은 하나님께’라는 신조로 살았는데 결국 그 길을 간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