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08.10.25 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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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李基豊)과 제주도 선교 (1)

  1907년 평양 신학교가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목사가 탄생하였다. 1885년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 선교사가 들어온 후 불과 20여년 만에 한국인 목사가 참여하는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그때 7명중 한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저 유명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는 등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가 작용하던 때였다.

이기풍 목사는 평양 태생으로 한학(漢學)을 하여 당시 엄격한 유교적인 관습에 젖어 있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최초 7명의 한국인 목사 중 한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마포삼열(Samel A moffett) 선교사와 얽힌 사연이 있었다. 그 당시 청년 이기풍은 성격이 괄괄한데다 당당한 체격과 강한 주먹으로 악명이 나 있었는데 그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전도를 하는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달려가서 온갖 행패를 부렸다. 그 뒤에도 선교사가 목회하는 장대현교회의 건축현장에 가서 짓고 있는 건물을 허물어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수요예배를 드리고 오는 선교사에게 날카로운 돌맹이로 턱을 때려 큰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얽히게 된 악연으로 인하여 그는 결국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감동되었고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는 그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훗날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가서 전도를 하던 중 그곳 주민들로부터 계속되는 박해를 겪다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역을 중단하고 떠나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자기의 그 심정을 그대로 글로 써서 평양의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두 달쯤 지난 후 선교사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이 흉터가 아물고 없어지기까지 더욱 분투노력 해야 될 것이오”라는 글이었다. 이 편지를 받자 그는 대성통곡하며 회개한 다음 쌌던 짐을 풀어놓고 그 사역을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수없는 박해와 죽음의 고비를 만날 때 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다잡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가 저지른 악역까지도 선으로 작용하게 하셨던 것이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