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라는 축복
언제부터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치아에 이상이 자주 생기곤 한다. 이따금씩 잇몸이 부어오르거나 둥글게 물집이 생기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교회에서 치과 의사인 장로님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리고 처방을 물었더니 잇몸이 붓고, 아픈 것은 그 속에 염증이 생겼거나 이상이 있다는 증거인데 근본 원인을 찾아서 치료를 해야 된다고 했다. 당장 통증을 잠재워 달라고 보채는 사람에게 먼저 원인부터 치료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의사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다.
이 의사 장로님이 ‘만세반석지’에 “통증의 축복”이라는 칼럼을 썼다. 치통이건 복통이건 무엇이나 통(痛)자가 붙은 것은 고통을 뜻하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축복이 된단 말인가? 사람에 따라서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것을 몰라서 당하는 수도 있지만, 더러는 만성 신경통처럼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고통도 있다. “앓던 이 빠진 것 같다”는 말처럼 충치나 썩은 이를 쉽게 빼 버리고 단번에 통증을 치료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속만 타들어 가는 운명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고통을 축복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장로님의 경우, 매일같이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마주하며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그 방면의 전문인이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단숨에 아픈 것을 해결해 달라는 성급한 주문만 하고 있다. 암만 그래도 본인은 거기에 상관없이 모든 지혜와 경륜을 동원해서 원인을 찾아내는 데 주력을 한다. 통증의 원인을 찾은 다음 차근차근 수순에 따라 치료를 하는 동안 통증은 저절로 사그라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건강에 비교하여 ‘통증이 축복’이라고 말한 논리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신체 리듬에 이상을 알리는 통증이 제 기능을 못하여 가시에 찔려도 아프지 않거나 뜨거운 물에 데었는데도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이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불행과 직결되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아픔이라는 축복의 경고 신호를 주신 것처럼, 영혼에도 경각심을 가지고 원인을 찾게 하는 신호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한 시험이 올 때 그 고비만 피하여 갈 방도를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처방에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진단에 따라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만 해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huam.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