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멀린 2009.10.04 16: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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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弄談), 덕담(德談), 진담(眞談)

 

조선 말엽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의 일이다. 안동 김씨 가문의 실세인 김병기(金炳冀)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대원군을 맞은 김병기는 상좌에 앉히고 주빈으로 극진히 대접했다. 진수성찬으로 차린 상에는 대원군이 좋아하는 국수 사발도 올라 있었다. 국수를 몇 젓가락 빨아올리던 대원군이 갑자기 재치기를 하다가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었다. 잔치를 시중들던 사람들이 민망한 광경을 보며 안절부절 하는데 대원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김병기를 향하여 호령을 한다. “네 이놈! 내가 아무리 밉기로서니 음식에 독을 넣다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김병기가 “합하! 그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하십니까?”하고는 대원군이 토해 놓은 것을 단숨에 다 먹어치웠다. 대원군은 내심 “너 참 대단한 놈이로구나”고 생각하면서 짐짓 “대감 ! 내가 농담 한번 한 것을 뭐 그렇게 까지 민망하게 하시오”하고 능청을 부렸다.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처럼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었었다. 그동안은 고인을 중심으로 지역과 이념의 대립을 일삼았던 사람들도 국장 기간 동안 하나같이 고인의 업적을 높이며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죽음에는 원수가 없다’는 말처럼 상가에 조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인의 좋았던 점만 들추면서 덕담을 하는 것이 예절 있는 사람의 양식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신문의 논단에서 “그때 말 못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모 교수의 글을 읽었다. 그분은 고인이 대중연설을 하면서 “모두 들고 일어나 이명박 독재정권을 타도하라”고 했다는 것과, 햇볕정책으로 빚어진 대북관계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이런 것은 덮어버리고 그분을 미화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고인이 남긴 공, 과는 역사적 판단에 따라 평가될 것이지만, 상가에서 유족에게 덕담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격식이다. 문제는 농담이든 덕담이든 누가 언제 어떤 장소에서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서 적절성의 여부가 판단된다고 본다. 대원군처럼 다른 사람을 생사의 갈림길에 세워놓고 ‘농담’이라는 말로 비켜가거나, 또는 가장 순수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덕담 수준의 입치레(lip service)로 가볍게 넘겨 버린다면 인간관계의 진정성이나 책임의식이 실종되고 말 것이다. 진담이 농담으로 치부되거나, 또는 진담과 덕담이 혼돈되는 인간관계야 말로 신뢰를 무너뜨리는 불행의 단초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www.hu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