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후암교회의 설립자가 평북 용천 용상교회에서 내 입교예식을 주례한 김예진 목사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참으로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러나 김예진 목사는 6ㆍ25 한국전쟁 중에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총살형으로 순교하였고, 사모님 한도신 권사만이 교회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나는 1960년 9월 부임 첫날부터 이 작고 가난한 교회를 한국 교회가 자랑할 만한 전도하는 교회로 갱신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모든 성도들을 전도일군으로 길러내기 위해 ‘전도학교’를 조직했다. 후암교회는 이 전도운동으로 결실된 새로운 성도들로 급격히 부흥했다. 100명에서 150명으로, 200명으로 그리고 300명으로 다시 500명으로. 3년 동안 급성장한 후암교회는 1963년 3월 새 성전 기공식을 거행함으로써 나는 한국교회 최초의 교회건축학의 표본성전을 건축하려는 구상을 실현했다. 기공 9개월만인 11월 추수감사절에 입당예배를 거행한 후암교회 새 성전은 한국 교회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 건축역사상 최초의 성전다운 성전으로 높이 칭송하는 교회가 됐다. 나는 후암교회의 행정과 예배와 목회의 모든 것을 한국교회 갱신의 표본이 되도록 개혁해 나갔다. 신도들은 급격히 증가했고, 1000명에서 2000명으로, 그리고 1975년에는 3000명에 달하는 한국 교회 중 대표적으로 선교하는 교회로 우뚝 서게 됐다. 나는 1960년 부임 첫해부터 후암교회에 선교위원회를 설치했다. 개교회에서 선교위원회를 조직한 것은 한국에서 후암교회가 처음이었다. 또한 1964년부터는 태국에 있는 김순일 선교사와 계화삼 선교사를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매년 <세계선교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젊은 세대들은 앞 다투어 선교헌신을 서약하기 시작했다. 나는 1961년부터 총회신학교에서 선교학과 전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총회장을 지낸 신세원 목사, 한명수 목사, 그리고 아세아연합신학원 총장을 지낸 임택권 목사, GMS를 창립하는데 앞장섰던 이영희 목사 등이 모두 이때 나에게 선교학을 배운 제자들이다. 나는 신학교에서 한 주일에 몇 시간씩 선교학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선교지도자를 길러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선교대학원을 설립하고 또한 초교파 선교사 파송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나는 1968년 3월 ‘국제선교신학원’(International School of Missions)을 설립하고 한국과 비서구권 국가에서 최초로 선교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이어서 같은 해에 한국 교회 최초의 비교파 신앙선교단체인 ‘국제선교협력기구’(Korea International Mission)를 설립했다. 이후 선교사 파송이 이어졌다. 1969년에 국제선교신학원 1회 출신인 윤두혁 선교사와 고옥현 선교사를 홍콩에 파송하고, 한 해 뒤인 1970년 태국 선교경험 14년째인 김순일 선교사와 김윤희 선교사를 태국에 재파송했다. 1971년에는 신홍식 선교사와 이순영 선교사를 태국으로, 임흥빈 선교사와 오인애 선교사를 부르나이로 파송하고, 1973년에는 이은무 선교사를 인도네시아에 파송했다. 일련의 선교사 파송으로 홍콩을 중국의 선교전초기지로, 세계 최대 불교 국가인 태국의 선교지도력 개발을, 그리고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선교인력개발이라는 개척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출처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8549[‘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4)] 후암교회에 부임하다 2011년 01월 25일 (화) 19:35:45 기독신문 ekd@kidok.com
선교지도력 개발에 본격 나서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나는 1960년 9월 서울에 있는 후암장로교회 담임목사 청빙을 받고 귀국했다. 후암교회는 이북에서 피난 온 피난민들로 1946년 조직됐다. 후암교회는 불타버린 적산가옥을 임시로 개축하여 만든 거의 무너져가는 허름한 예배당에 100여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가난한 교회였다.
▲ 미국 유학 중에 청빙을 받고 귀국한 조동진 목사는 후암교회를 선교 행정 부흥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교회로 변모시켰다. 특히 후암교회는 한국 교회 처음으로 교회 내에 선교위원회를 조직하고, 매년 선교부흥회를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