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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 (12) ] 화해·평화 선교통한 통일환경 조성 ①
2011년 04월 04일 (월) 16:17:57박민균  min@kidok.com

1989년 평양 첫 방문, 남북화해 힘쓰다

  
 ▲ 조동진 목사는 세계선교와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사역에 매진했다. 조 목사는 남북냉전 시대에 북한을 방문하며 남북교회 교류에 힘썼고, 북한을 세계 무대에 나오도록 이끌었다. 이런 사역으로 조 목사는 고 김일성 주석과 수차례에 걸쳐 대담을 하며,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은 주석궁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는 조동진 목사. 
 
나는 1978년 후암교회 담임목사 직을 사임하면서, 1949년부터 시작한 30년간의 목회생활을 끝맺었다. 나는 후암교회를 떠난 1978년부터 북한 출신 목회자들과 함께 북한해방기도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을 위해 평안도 출신 백낙준 박사가 고문이 됐고, 한경직 목사께서 중앙위원장이 되었으며, 조향록 목사 등 각 교단 대표들이 참여했다. 또한 국방부장관 출신 김일환 장로, 육군대학 총장 출신 나희필 장군 등과 이북 출신 주요 목회자들이 중앙위원이 됐다. 나는 대북활동위원장으로 일했다.

북한해방기도운동은 정부의 통일원(현 통일부)의 행정적 뒷받침을 약속 받고 전국대회를 유관순기념관에서 개최했으며, 매월 북한연구심포지엄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된 후 신군부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이후, 국내에서 통일선교를 위한 운동을 계속하기가 어렵게 됐다.

이에 1980년부터 미국 윌리암케리대학교에 고려연구소를 설립하고 미국 대학교 이름으로 미국에서 직접 대북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활동으로 먼저 통일신학동지회를 조직했다. 통일신학동지회는 재미교포 출신 학자들을 중심으로 북한연구를 진행하면서 북한과 접촉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빈과 핀란드 헬싱키 등에서 ‘북한과 재미 학자의 대화’를 개최하여 북한 기독교 대표들과 북한의 조선통일위원회와의 접촉을 시작했다.

이런 활동을 계속 하던 중, 나는 1989년 1월 평양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 북한 방문은 1946년 2월 내가 시무하던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고관국민학교를 떠나 남한으로 온 지 43년만의 고향방문이었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박관오 박사와 부총장 최장룡 박사의 안내로 김일성종합대학의 캠퍼스를 남김없이 둘러보았다.

또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해방 당시에는 용천군 양관면)을 방문하여 그곳에 아직도 살고 있는 사촌 형제들과 그들의 자손들 70여 명을 만났다. 나의 넷째 작은아버지의 막내아들인 덕승의 집에서 사촌형제들과 그들의 여러 자손들과 만나 43년 전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고 다음 날 모두 함께 조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성묘했다. 50년 전 할아버지를 모셨던 산소는 원래 아름드리 소나무 숲 속에 있었는데 그곳 역시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되었다. 나의 할머니는 1948년 세상을 떠나 할아버지 무덤 옆에 묻혀 있었다.

나는 사촌들과 그 자녀들과 함께 무덤 앞에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말씀을 읽어주고 함께 머리 숙여 기도했다. 사촌들에게는 40여 년 만에 처음 드리는 예배였지만 모두 옛 추억과 함께 숙연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후 1999년까지 10년 간 매해 봄과 가을 두 차례씩 20여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1990년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의 평양신학원 방문교수로 임명됐다. 나는 윌리암케리대학교 부총장 키츠먼 박사(Dr. Dale W. Kietzman)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UN주재대사를 지낸 한시해를 만났다. 그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나는 다음 해인1991년 6월 1일 윌리암케리대학교 총장 명의로 한시해 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8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간부들과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대표를 미국으로 초청한다.



출처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6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