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미가서 6장 6절로 8절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삽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첫째도 감사요, 둘째도 감사요, 마지막도 감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뿐인 인생을 사는데 너무나 우리는 사소한 것에 상처받고 낙심하고 고통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린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됩니다. 의미 있게 보람 있게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좌우 옆에 두 분 이상 이렇게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미가 선지자 하면 무엇을 기억할 수 있냐 하면 예수님 탄생 7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을 예언한 선지자로 우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미가 선지자가 활동할 때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이사야 선지자, 호세아 선지자, 아모스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고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해서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받고 남 왕국 유다도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그러한 문제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 우상숭배를 저들이 앞서서 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불의가 판을 쳤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지도자들조차도 죄의 홍수에 빠져서 죄 짓고 불의한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도 같이 타락했습니다. 총체적인 타락입니다.
이 때, 미가 선지자가 일어나서 저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저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찢고 진정한 회개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제물을 많이 드리고 형식만 갖추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인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가서 6장 6절로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야훼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야훼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내가 무엇을 갖고 나아갈까?’ 그들이 통회자복하며 마음을 찢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이 제물을 갖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실까? 많은 제물들을 갖다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하고 저들의 죄를 회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 우리에게 은혜가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축복이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을 합니다. 이 미가서 6장 8절은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불리웁니다.
1.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삶
먼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미가서 6장 8절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이 인정할 만한 삶을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또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가 굳건히 선 나라에는 약한 사람들의 모든 어려움을 늘 돌봐주고 저들의 권리를 지키고 보호해줍니다.
그러나 이 정의가 바로 서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는 그러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서 7장 5절로 6절에,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말씀했습니다. 그 당시 약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방 사람들, 또 과부, 고아, 어디에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외국에서 이곳에 들어와서 사니 그들은 마치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별히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이 있어가지고 자기 종족이 아니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도 좀 비슷한 점이 있어요. 단일민족, 단일민족 해가지고 한국에 와서 사는 많은 이방인들을 우리 형제, 자매로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업신여길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200만 명 가까운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에 시집오는 분들만 해도 2만 5천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중에 누가 국회의원에 후보로 되어서 이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막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숙한 우리 모두의 모습을 어디서 발견할 수가 있느냐? 사랑의 포용력에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을 돕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2,700년 전에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이 지금까지도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과부를 보세요. 남편 하나 믿고 의지하고 살았는데 남편이 세상을 갑자기 떠나서 애들 키워야 되죠, 생활해야 되죠, 얼마나 힘듭니까? 고아를 보세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 가지고 홀로서기를 해야 되니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약자를 돌봐주고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따릅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 높여드리고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요번에 선교대회에 많은 선교사님이 오셨는데 그 중에 저한테 책을 갖다 주신 분이 두 분 있어요. 그런데 그 책 중에 한권의 제목이 "Jesus + nothing = Everything"입니다. 그냥 우리말로 편하게 해석해드리면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내가 무언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상처를 받는 거예요. 왜? 내가 특별한 존재니까.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면 남에게 피해를 입힐 것도 없고 상처를 받을 것도 없어요.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의 실천은 특별히 지도층에게 요구됩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가 보니까 당시 지도자들부터 타락했어요.
미가서 3장 1절로 3절에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얼마나 이 지도층이 타락했는지 그냥 표현을 적나라하게 했어요. 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것 같이 고통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도자로 세운 것은 정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섬기라고 권세를 주셨는데, 그 권세를 가지고 저들이 약한 사람을 짓밟고 그들의 가진 것을 착취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앞장서서 죄를 짓는 그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 마저 타락해서 거짓된 예언을 하고 뇌물을 받고 또 잘못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주 총체적인 타락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이와 같이 저들에게 외칩니다.
아모스서 5장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불의를 행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50명의 성도로 시작해서 8,000명의 대교회로 성장시킨 뉴욕 맨해튼의 리디머 장로교회 팀 켈러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팀 켈러 목사님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쓰셨어요. 이 분은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더 중시하고 정의를 부수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은혜와 정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와는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 아직도 이렇게 어둡고 문제가 많으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아직 바로 서지 못한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서야 합니다. 이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가 은혜로 살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의롭게 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로만 주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그 삶 자체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도록 주님이여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죄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때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6장 1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할렐루야.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선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내가 스스로 의로워서 재판장이 되어서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판하고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늘 깨어지고 낮아져서 주님만이 영광 홀로 받으시옵소서. 주님의 뜻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의롭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2. 긍휼과 자비의 삶
둘째로 우린 긍휼과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가서 6장 8절에, 인자를 사랑하며 말씀했습니다.
여기 인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또 우리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인자란 말을 히브리 언어로 ‘헤세드.’ 라고 하는 말을 썼는데요. 이 말씀 속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또 은혜, 긍휼, 자비 이와 같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씀합니다.
룻기를 보면 그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저들의 삶속에 늘 이 인자가 있었어요. 이 헤세드라고 하는 그 인자, 인애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씀합니다.
나오미가 홀로 되었을 때 룻이 그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를 잘 모셨습니다. 시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이 보아스에게 감동을 주어서 보아스가 그들에게 이 사랑을 은혜를 베풀게 되었던 것입니다.
룻기 3장 10절 보면 이와 같이 말씀 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야훼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희생적인 사랑, 베푸는 사랑, 남을 위해주는 사랑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 나, 나,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우리 주위에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정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 앞에 충성하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받은 바 은혜를 베풀고 나누는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외치고 계신 사랑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보다 앞서서 사랑의 마음 사랑의 동기를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게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게 내가 이렇게 선한 일 했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을 하지 말고 마음으로 먼저 주님을 잘 섬겨서 이웃에게 선한영역을 미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주일날 빠지지 않고 예배를 잘 드리고 어떤 분은 또 그럽니다. ‘내가 성찬주일만은 절대 안 빠집니다.’ 다른 때는 좀 빠질 때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또 어떤 분은 ‘저는 기본적인 의무는 잘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합니다.’ 그러고 다 된 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될 의무이지만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은 받은 바 은혜를 나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옆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나가지 말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올 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드려진 사랑의 모습을 갖고 나올 때 사랑의 열매를 갖고 나올 때 주님이 기뻐 받아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아름다워져요.
미국에 아주 독실한 크리스찬 가정에서 한국에 버려진 고아를 입양했는데요. 그 입양에 스토리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스티브 모리슨 이야기』라는 책으로 나왔는데 한국 이름은 최석춘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해서 매일같이 술을 먹고 어머니를 때립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매를 맞다 못해서 집을 나갔어요. 이 아버지도 밤낮 술 취해 들어오다가 5살 때 집을 나가버려서 5살 때 고아가 되서 길거리에 내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음식을 구해야 되었고 어디 땅에 동전이라도 떨어진 것이 없나 동전을 주으러 다녀야 됐고요. 다리 밑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고 정말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고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14살 때 입양이 된 거에요.
그의 양부모님은 이미 1남2녀를 친자녀를 두었는데도, 또 한국에서 입양을 했고, 또 이 아이를 입양을 했어요. 얼마나 주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넘쳤는지 이 최석춘이 고아로 자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입양을 하고 처음 미국에 들어오는 날 한국에서 왔다고 양배추 절여서 김치를 만들어가지고 먹여주고 또 석춘이가 다리가 잘 다쳐서 다리가 불편해서 다리가 제대로 걷지 못하니 수술비용을 다 내서 수술도 해주고 이 때문에 그 어머니가 나가서 일을 열심히 해야만 했어요. 그것 다 비밀로 하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요 어느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스티브, 나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좋은 결정을 내렸단다. 그 중 최고로 좋은 결정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네 어머니와 결혼한 것, 세 번째는 너를 우리 가정에 입양한 것이란다.”
그래서 이 최석춘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해가지고 미 우주항공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 되었습니다. 때로 자기가 자기 정체성 때문에 혼돈이 되서 내 한국이름 최씨를 찾아달라고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아버지가 말을 합니다.
"스티브, 네가 한국 사람이 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미국 사람이 된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란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아름다운 삶을 살아 갈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던 중 주님께서 마음속에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네가 고아가 된 것이 우연히 아니다 너 자신이 버려진 아이가 되지 않고 어떻게 부모 없는 아이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니 아직도 한국에는 그 런 아이들이 너무나 너무 많단다. 너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겠냐?”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눈물을 쏟으며 ‘이제 내가 버려진 아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래서 한국입양홍보회를 설립하여 고아들의 입양에 앞장서게 되었고요. 한국입양홍보회는 현재 미주지역에 다섯 개 지부와 한국 내 28개 지부를 두고 활발한 그 입양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우린 들어야 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린 결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온 세상이 사랑이 없어 병들어가고 있어요. 얼마 전에 중앙일보 보니까 일면 톱기사로 뭐가 나왔느냐. 흉악범, 강력범들을 조사를 해봤더니 2/3가 어릴 때 부모로부터 상처받고 불우한 가정들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예요. 마음속에 한을 품고 나중에 범죄자들이 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저들을 사랑하고 돌봐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안 생길터인데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서 모든 상처가 치유함 받고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에 갈급하여 부르짓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503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새찬송가 503장/ 통 37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
1.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이루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
히브리서 13장 16절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여러분 사랑에 실천자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십시오.
3.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셋째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가 6장 8절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어디로부터 출발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요. 우리에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기 때문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이 죄악이 온 인류역사를 뒤덮었습니다. 늘 우리는 교만의 노예가 되어서 나, 나 내 자신만을 주장하며 삽니다.
대단히 죄송하게도 애들이 자랄 때 가만 보면 내가, 내가, 내가, 내가 그 많은 말 중에 내가라는 말을 제일먼저 내가, 내가 그리고 움켜쥐고 안내놔요. 여러분 우리 인간이 그와 같습니다. 어린아이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내가 이것이 교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겸손히 낮아져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따라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이 이 겸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받을 것이 없어요.
어느 사람이 그럽니다. “저 친구 목에 힘주고 다니네. 왜? 나한테 인사를 안해?” 그렇게 이야기 할 것 없어요. “많이 컸다 너.” 그렇게 뭐 하면 볼 것도 없어요. 내가 겸손하면 되는 거지요. 그들이 나에게 먼저 인사를 안한다. 그러지 말고 내가 쫒아가서 인사하면 어떻습니까? 뭐가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불편하게 삽니까? 편하게 사세요. 인생 두 번 살 것도 아닌데 주님과 동행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에녹은요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어요. 하루도 제대로 동행하기 힘든데 365년을 동행했어요.
그래서 창세기 5장 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죄악 많은 세상에 더 이상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는데요. 말이 그렇지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어요. 죄악이 차고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기뻐보신 것입니다. 하나님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를 찾고 계세요.
이사야 2장 17절에,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야훼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자고’, 스스로 잘났다하는 사람들은 굴복 될 거라 해요. 여러분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는요 매 예배시간마다 기적을 봐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수천 수만의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주님께 드리잖아요.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 할 것 밖에 없더라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추는 사람들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요.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미 우주항공국 항공연구 부문에 최고 책임자인 신재원 박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NASA에 들어가기를 꿈꾸고 나사에 미국에 가서 박사를 받고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동양인으로서 누구도 자기를 끌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뒤에 하나님 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나사에 들어간지 20년이 되기도 전에 2008년도 NASA에서 3번째로 높은 자리 항공연구부문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도 연방정부 최고의 직원에게 주어지는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렇게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는가. 한국 사람이 달나라 로켓트를 쏘는 NASA에 들어가서 동양인으로서는 최고 높은 자리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한 가지 성공요인을 꼽으라면 늘 교만해지지 않도록 겸손을 연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땅에 납작 엎드리게 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주시옵소서.”
할렐루야. 납작 엎드리는게 쉽지는 않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시편 147편 6절에, 야훼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잠언서 18장 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왜 우리가 겸손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보세요. 430년 동안 종살이 할 때 그들을 해방시켜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앞에 홍해가 가로막힐 때 홍해를 갈라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광야 40년 동안을 갈 때 먹이고 입히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요단강을 가르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 가운데 지키시고 돌보시고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감사해야지요. 감사해야지요.
장 바니에 박사가 쓴 「인간되기」라고 하는 책이 나왔는데요. 참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책입니다. 이분은 1928년 9월 10일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있을 때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나신 분인데요. 그 아버지는 캐나다 총독을 지낸 ‘조지 바니에’ 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은요 2차 세계대전 때 벌써 13살 때 영국왕립 해군아카데미에 입학을 했고, 그 다음 영국과 캐나다에서 해군 장교로 복무를 했습니다.
제대하고 난 다음 철학과 신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는데 그가 하루는 그의 스승이 일하고 있는 정신요양원에 갔다가 자기가 그렇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여러 가지로 장애있는 사람들을 섬기는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내가 교수로서 이렇게 모든 영광을 누리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교수직을 내려놓고 블란서에서 집 한 채를 구해가지고 거기에 발달장애를 가진 두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가 섬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참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불어로 방주라는 의미를 가진 ‘라르슈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핸리 나우헨이 이 공동체에 함께 참여해서 장애인들을 섬겼는데 이곳에는 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사랑으로 섬깁니다.
1964년부터 이 섬김의 사역을 시작해서 현재 이 공동체가 전 세계 35개국에 134곳에 세워지게 됐고요. 그 다음에 그가 또 시작한 사랑의 공동체와 믿음과 빛 공동체가 75개 1300여 곳에 세워지게 됐어요. 이 한 번의 섬김이, 사랑이, 겸손의 모습이 온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장애인들을 섬기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미가서 6장 8절 말씀에 있습니다.
야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삽니다. 그의 고백을 들으세요.
“저의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것, 가장 연약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알리는 것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정의를 행하며 긍휼과 자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은 십자가 사랑의 실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2012. 6. 3. 성찬주일설교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