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묘지
영등포 당산역에서 합정역에 이르다보면 바른 편에는 천주고 절두산 기념교회가 왼쪽에는 개신교 외국인 연합교회가 버티고 서 있다. 두 교회는 공히 양화진이라고 하는 한국적 역사와 맞물려 고난의 불수뢰를 끌고 역사의 분수령을 넘다가 붉은 태양처럼 뭄을 태우며 숨을 거두고 잠들었다는 특징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기자가 합정역에서 내려 절두산을 바라보며 합정 시장쪽으로 들어섰을 때 만가지 상념이 밀려옴은 어쩔 수가 없었다. 2백년전 역사의 현장이 바로 여기였기에 느껴지는 감회일 것이다.
합정동 시장쪽에서 절두산 쪽으로 얼마를 오르다 보면 2호선 전철이 지나는 육교 옆 바른쪽으로 넓게 트인 공원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외국인 묘지다. 공원은 한쪽 옆으로 깍아 주차장을 만들고 언덕같은 둔덕 위에는 하얀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외국인 교회인 유니온 처치다. 그 옆으로는 나무도 심고 풀도 심어 어설프나마 공원의 정취가 돋보이게 했다.
기자가 성큼 공원묘원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담장 옆에 커다랗게 세운 설명문이 눈에 뛰어들어 온다. 언제 외국인 묘지가 조성이 되었고 이곳에 뭍힌 이들이 누구며 어떤 역사를 살았는가에 대한 소상한 설명이다. 정신없이 취재 노트를 메우며 후리 노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 여인이 팔을 끼고 무덤 쪽에서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 두툼한 옷을 껴 입어야하는 불순한 일기임에도 여인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오늘이 이 공원 묘원에 뭍힌 어느 고인의 기일이라도 되는가?'
기자도 여인들을 지나쳐 묘지가 누워있는 공원 쪽으로 무엇에 빨려 들어가듯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때는 저녁 4시가 지나있어 막 한강을 건너 영등포 쪽으로 기울어 있든 태양이 무덤위로 빛의 잔영을 끌고 있었다. 어지럽게 누워있는 묘원들은 서양 영화 속에서 쉽게 보아지든 묘지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 주를 사랑하는 종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누워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다 숨진 아무개가 여기 누워있다'
어느 묘지 뒷면에는 <우리는 결코 한국인을 위해 쏟은 당신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도 새겨 놓았다. 하나같이 평토장이고 희미한 봉분이 형태만을 드러낸 애장도 여러기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에 살던 외국인이 성인만 죽었겠는가? 문명의 빛이 스며들지 못하는 동토에 살다보니 의료 시술을 받지 못해 억울하게 슬어진 어린 영혼도 많이 있었으리라. 그들은 지금 침묵으로 누워 이렇게 솔바람 속에서 사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앞에서 기자는 지금 역사의 함성을 듣고 있다. 아니 그 목소리는 어쩌면 비명 소리일 것이다.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면서 끝내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목이 잘려 죽어야 했던 그 힘없는 백성들의 비명 소리. 그 비명 소리는 바로 내 가슴 한복판에 솟구쳐 나오는 우리 자신의 비명이자 우리 조상들의 비명이다. 죽이는 자나 죽는자 모두 나이고 우리다. 양화진 이곳을 알려면 역사라는 안경을 끼고 들여다 보아야 비로서 그곳에 뭍힌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양화진과 역사의 숨결
양화진은 본래 이조의 한양방비 5진중 하나였다. 한강진, 노량진, 동작진, 송파진, 양화진은 한양 방비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중 양화진은 경기도 고양땅 이북을 지키는 중요한 나룻터 역할을 한 것이다. 양화진은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이다.
제2한강교 상류쪽에 위치했던 양화진은 그 덜머리와 함께 한강변 최고의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이곳 양화진은 구한말 한국에 전래된 신구 양 교파에 끊을 수 없는 유적지가 된 것이다. 천주교는 1866년 일어난 병인교난(丙寅敎難) 때 대원군에 의하여 교도 1만명을 잃어 버리므로 피맺힌 순교 성지가 되었고 개신교는 한국 선교에 몸바쳐온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이곳에 뭍힘으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순교 성지가 된 것. 그래서 그런가 절두산 기념교회와 서울 외국인 교회는 마주 서서 바라보면서 서강밖 양화나루에서 강바람을 같이 맞고 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