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혼 일렁이는 제암리교회
수원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20여 킬로미터를 달리다보면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이르게 되는데 차 우측에 유난히 우뚝 선 돌 십자가 탑과 함께 교회가 보이는데 바로 이 교회가 1919년 3.1운동 당시 일본군에 의해 29명의 순교자를 낸 제암리 교회다. 지금은 마을 앞으로 도로가 트여 서해안 고속도로와 함께 서울, 수원이 한나절 코스가 되었지만 3,1운동 당시는 경기도 외곽 한적한 전형적 한국 농촌마을에 불과했다. 그런 농촌 마을이 어쩌다가 한 마을 젊은 남정네 전부를 잃어버리는 무서운 재앙을 만났는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충절 때문이다.
3,1만세 운동은 실로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보여준 민족적 거사였다. 1919년 3월1일- 5월30일까지의 시위회수는 1,542건에 참여 인원은 2백5만 1,448명. 당시 인구 2천만으로 계산한대도 10,5%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는 3,1만세 운동이 얼마나 거국적으로 일어났던가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국국민이 입어야 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한 것이었다.
피살자 7천5백9명, 부상자 1만5천 850명, 기소된 피고 4만6천306명, 파괴된 건물 학교 2개교, 교회 47동, 민가 715채였다. 당시 전국에는 218개 면이 있었는데 211개 면이 일어나 만세 시위를 했다. 이는 아무리 일제의 탄압이 거세다고 할지라도 민족적 얼은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쾌거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입은 교회의 피해는 너무도 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평남 강서군에 소재한 강서 교회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산16번지에 소재한 제암리교회였다. 강서 교회에서는 60여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고 제암리교회에서는 29명, 정주교회에서도 50명, 맹산교회 60명, 대구지역교회 120여명, 곽산교회에서도 1백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서로 끌려가 매를 맞고 그중 절반이나 되는 50여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일본군의 시위 진압은 무자비했다. 그들은 비무장 저항 시민을 향하여 무차별 발포해 사살했고 체포된 시민을 경찰서로 끌고 가 몽둥이로 마구잡이 린치해 타살했다.
이렇게 순절한 숫자가 7,509명, 부상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들어 죽거나 불구자가 되어 슬픈 삶을 살다가 죽어갔다. 심능균의 ‘항일독립비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도 있다. 평남 대동군에 소재한 청호리교회에는 곽치문, 박치은 부부 집사가 있었다. 두 부부는 3,1운동을 맞아 대동장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 일본 헌병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당시 부인되는 박집사는 낳은지 한달밖에 되지 않는 어린 핏덩이를 업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 측에서는 어린이는 유치장에 들일 수 없다며 어린아이를 빼앗아 유치장 밖에 내동댕이쳤다. 아이는 밤새도록 배가 고파 울다가 지쳐서 이튿날 새벽 숨졌다. 어머니는 아이가 죽어가는 장면을 유치장 안에서 지켜 보아야 했다.
일본 헌병들은 이런 형벌 만으로도 양에 차지 않는지 여자의 옷을 발가벗기고 온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팬후 담배 불로 지져서 만신창이가 되게 했다. 또 남편 곽집사는 때리는 고문만 하지 않고 남자의 국부(局部)에 심지를 꽂고 불을 붙여 성불구자로 만들어 버렸다.
기자는 제암리 교회의 십자가 탑을 바라보며 인간이 얼마나 신 앞에 포악할 수 있는가에 저윽히 전율해 보는 것이다.
제암리는 본래 순흥 안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인심좋고 학문을 사랑하며 순박하게 살아가던 이 마을에 예수가 들어오게 된 것은 1905년 이 땅을 찾아온 아펜셀라가 이 마을 청년지도자 안종후(安鐘厚)를 기독교인으로 전도하고 부터였다. 안종후는 기독교인이 된 후 자기 집 안방을 예배 처소로 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제암리 교회가 출범하게 된다.
그는 더욱 열심을 다해 친척들을 전도해 1911년에는 급기야 8칸 짜리 초가 예배당을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재정적으로 교역자를 모실 수 없는 미자립 교회가 되니 속장으로 임명된 안종후, 홍원식, 강태성, 안진순등이 교회를 이끌어 나갔고 인근 수촌리교회, 남양교회 교역자들이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다.
그중 제암교회를 순회 목회한 동석기(董錫基),김교철(金敎哲)목사는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인물이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민족의식이 뛰어났던 교역자들의 지도를 받았던 교회 속장들은 천도교측 민족지도자인 고주리의 김성열(金聖烈)과 모의하여 제암리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3월15일부터 산 위로 올라가 봉화불을 올리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제암리 교회 성도들은 드디어 3월31일 발안장날을 기해 일제히 뛰어나가 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5일 장에도 나가서 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시위를 벌이며 제암리 교회 성도들은 많은 부상을 입었다.
청년회원 김순하는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안진순 속장이하 여러 성도가 경찰에 연행되어 무수히 얻어맞고 훈방된 것이다.
제암리 교회 성도들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부상을 당하자 악에 받혔다. 며칠후 제암리 교회 앞마당에는 시위 군중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일경은 그들 시위대가 발안 주재소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무장한 4명의 일경을 제암리 교회에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일경이 무장을 했다고 하나 시위대와는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주재소장 사사카(佐板)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아이쿠”
군중 속에서 비명이 쏟아지며 안종후 속장이 쓰러졌다. 격분한 군중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대항했다. 일경은 총을 쏘며 사태를 진압하려 했지만 역부족이라 뒤로 밀리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경찰이 쫓기자 뒤따라가 일경 한사람을 때려죽이고 말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