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월리 바다에 수장된 65명의 순교자
국군환영식후 온 교우 함께 순교열차타고 천국입성
6.25전 북괴군 침투시켜 양민 교란 꾀한 공산당
인민재판 이용 유지살해 제동걸자 앙심보복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번지에는 역사가 91년이나 되는 오래된 교회 야월리 교회가 있다. 야월리 교회는 초기에는 염산리교회로 불리다가 옥실리교회가 봉남리로 이거하고 염산교회로 개명하자 야월리교회는 소재지인 야월리 이름을 따서 야월리 교회로 불리우게 되었다. 바로 이 야월리 교회 앞에 공산 도배들에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65명의 순교탑이 세워져 있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읽을 수 있게한다. 예장 광주노회가 주축이 되어 건립한 순교탑에는 이런 애절한 비문이 새겨져 가고오는 이들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순교기념탑 건립에 즈음하여
1898년 목포에 선교부를 세운 남장로교 소속의 배유지목사 일행의 선교 활동으로 이곳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구한말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곳에 서도 친일적인 일진회를 반대하든 문영국, 정정옥씨 등이 교회를 찾았으며 이렇게 하여 1908년 4월5일 야월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해방이후 야월도가 연육되면서 부터 교인들이 지역사회의 주축을 이루면서 교회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2일 이 지역에 상륙한 숫자 미상의 인민군의 기습이 한 기독교인의 제보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갈등으로 교회 탄압을 가하던중 1950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기독교인들을 살해 하였다. 교회는 불타고 교인 65명 전체가 죽임을 당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가 일시 단절된듯 하였으나 이들의 거룩한 씨앗이 큰 나무로 성장하여 이곳이 믿음의 모퉁이 돌임을 오늘까지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광주노회는 정성어린 기념탑을 세우면서 이곳이 여호수아의 증언석이 되어서 (수24:17) 65명의 귀한 순교의 신앙을 영원토록 전해주기 바란다.
언뜻보기에 야월리는 염산면에 속한 작은 섬으로 평화롭게 보이기만 한다. 주민들의 생업은 어업이거나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염업 종사자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운 동리 야월리 전체가 공산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고 교회에 출석하던 65명 전체 교인이 순교하는 어처구니 없는 참화를 입게 되었는가?
사건의 전말은 1950년 6월22일 저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그날 저녁 괴뢰군 1개 부대가 야음을 틈타 창수 앞으로 부터 상륙하여 영광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무장한 괴뢰군들이 육지로 상륙하는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고 염산면 지서에 적 출현을 보고를 했다. 괴뢰군 출현 소식을 접한 지서에서는 급히 광주경찰서로 전통을 쳤다.
“인민군 일개부대 출현. 염산면 내남리 독립가옥에 은거중” 광주 경찰서에서는 염산면에서 전통이 올라오자 즉각 광주에 진을 치고 있든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했다. 공산당 푸락치인 국군 장교들에 의해 여순반란 사건이 터진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 진압군은 아직도 광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염산면 오동리는 남노당 거물 간첩 김상룡의 고향으로서 그를 추종하는 지방 빨치산이 많아 사직당국에서도 늘 경계를 하든 곳이고 또 공비들이 수시로 출몰해 양민들의 재산을 빼앗아감은 물론 우익 인사들을 납치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뜩이나 사고 다발지역으로 점찍힌 지역에서 괴뢰군 출현을 알리게 되자 국군 토벌군이 출동해 내남면 야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숫적으로 열세한 괴뢰군은 이내 꽁지를 내리고 도망을 치게 되었다. 아군은 쫓기는 적을 뒤 쫓아가 모조리 섬멸을 했다. 그러나 몇명이 살아서 부상을 당한채 도망을 갔다. 야월리교회 정일성집사의 동생 정문성은 그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부상한 공비 잔당을 발견하고 붙잡아 그를 경찰에 인계했다. 경찰은 정문성을 포상했고 사로잡힌 공비는 입동 상여집 앞에서 사살해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사실이 산속에 숨어있는 공비들에게 전해졌다. 마을 주민 중에는 공비들과 내통하는 사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공비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는 이를 갈았다.
“야월리교회 교인놈들. 우리가 씨를 말리리라.”공비들은 야월리를 향해서 독한 가래침을 뱉었다. “야월리교회 순교자”라는 레포트를 작성한 배길양목사는 6,25전 6월22일의 괴뢰군 상륙에 대해 이런 해설을 달고 있다.
“북한 공산당은 6,25를 일으키기전 벌써 괴뢰군 선발대를 내려보내 양민 교란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6.25가 발발하고 정규 괴뢰군이 야월리 같은 작은 부락을 점령하고 붉은 사회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 적색 깃발아래 작은 마을을 죽음의 굴혈로 만든 것은 바로 지방 빨갱이 들이었든 것이다. 이들은 툭하면 지방 유지들을 끌어다 인민재판을 했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김희철씨는 이런 증언도 해 주었다. 지방 빨갱이들이 지방유지인 채모 양조장 주인과 또다른 사람을 교회당 앞에 잡아다놓고 인민재판을 시작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은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입니다. 이 악질 반동들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사회자의 제안이 끝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각본을 외우듯 소리쳤다.
“인민의 원수이니 죽여야 합니다” 그 때였다. 야월리교회 김성종영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됩니다. 두 사람은 인민의 피를 빨만큼 악질 반동을 한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채 영감님은 동리에 가믐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동리 사람들이 굶게되면 친히 자기집 광에서 쌀을 퍼다가 주므로 우리가 어려울 때 그래도 굶어죽지 않고 살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말해보시요. 우리중 누구 한사람 이 어른에게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동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니 있으면 있다고 해서 우리 한번 진위를 가려봅시다.”
"옳소. 옳소”
그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동리 사람들은 빨갱이들에게 그렇듯 사주를 받았음에도 어느샌가 김성종영수의 발언에 옳소를 연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 세력들의 계획은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들은 어이없게 참패를 하고는 그 패인을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덮어 씌었다. 공산당과 기독교는 갈수록 꼬이고만 있었다. 그런한 세월속에서도 날자는 흘러갔고 9월 하순이 되자 그 마을에도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앞바다로 밀고 들어와 서울을 탈환했다고 하는 소식이었다. 이른바 9,28수복이다. 야월리에서는 이 소식을 10월 초순에야 들었다. 좋은 소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염산면에 소재한 초등학교에서 국군 환영대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반가웠다. 공산당이 없는 민주사회가 된다고 생각하니 마을 사람들은 너무도 좋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빨치산이 산야 곳곳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 환영행사가 열리는 초등학교로 몰려나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국군 만세”
국군 환영식장에서 소리높여 만세를 부르든 사람들은 우익 진영의 사람들과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미움이 이들 빨갱이들의 가슴에서 활활 타올랐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