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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주 2003.07.19 23: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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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아브라조"저희팀을 이끌고계신 우리 선생님의 이야기인데
참 아름다워서...올립니다<예수마을교회홈피에서 퍼옴>==========

#1. 그 남자, 그 여자를 만나다

만남도 특별했다.
빼어난 미모로.. 모델경험을 가진 그 여자의 사진을 보고..
그 남자가.. "찍었다".
그것이 86년도. 지금으로부터 17년전의 일이다.
서른 다섯의 나이.. 벌써 음악 인생을 15년이나 넘게 살아온 그 남자에겐.. "가을"이란 작품속..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고.. 평온하기까지 했다. 사진을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기회를 만들고..
"모델"의 이름으로 나온 그녀에게 접근(작업?!)을 했다.
아무도 성공 못하리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주변 사람들은..
결국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꿍... 놀라야 했다고.


#2. 결혼, 그리고 쉽지 않은 인생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사랑도 있고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아픔이 찾아왔다. 유선이가 백일을 지났을 때부터였을까.. 김영숙 집사님은 '혼자'가 무엇인지 알았다. 음악으로 바쁜 남편,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 나를 향해 슬픈 눈을 하고 있는 딸 아이. 문영배 집사님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작업"에 들어와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결국에 김영숙 집사님을 교회로 끌고 오셨다고 한다. 선하신 인도.. 예배당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쏟아야 했던 감격스런 첫만남. 주님은 그렇게.. 오랫동안.. 김영숙 집사님을 "벼르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3. 이혼, 가능한 일일까?

남편은 아내에게 찾아와 이혼을 요구했다. 딸아이가 네 살이 될 때까지.. 정은 있었지만.. 집밖에 있던 아빠가 꺼내놓은 엄청난 폭언이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했다. 그리고 꺼내놓은 말은 '예수님 믿으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 라는 한 마디였다. (이 부분에 대해 문영배 집사님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듯'했다고 회상하시고 있어요.. ) 믿기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에.. 문집사님은 이혼 수속을 진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기하기도 하지.. 전문가에게 의뢰해.. 꽤 많은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만든 이혼서류가 통과되지 못했다. 하자가 있다는 법원 담당자의 말.. 발길을 돌려 그 곳을 나선 두 사람은.. 결국 이혼에 성공하지 못했다.


#4.한 지붕 한 가족

그 뒤로 7년, 결혼을 하고.. 10년이 다 되어서야.. 한 지붕 한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속에서 예성이가 태어났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예성이의 출산. 철모르고 쑥쑥..
건강하게 자라주는 유선이가 이뻤고, 주님의 약속처럼 태어나준 예성이가 고마왔다. 그렇게 다시 찾은 평온 속에서.. 하나님의 두 번째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문영배 집사님을 향한 하나님의 작업은 먼저, 세상 음악을 잘라내라는 단호한 명령으로 시작됐다.


#5.세상 음악을 버리다.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거다.
누가 부탁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니었을거다.
왜였는지. 무엇 때문지 모르지만.. 그는 드럼을 사랑했다.
66년, 고등학교를 진학하려던 겨울에.. 친구에게 드럼 스틱을 선물받았다. 겨우 그것 하나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드럼 스틱을 받았으니.. 드럼 학원을 다녀보자는 것이 시작이었고 그렇게 6개월을 배웠다.
하지만 거기까지. 부모님은 더 이상의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공부하고 미래를 준비해야할 나이였지만 17살의 어린 문영배는 음악을 선택했다.
19살, 부모님과의 담판 뒤에 미8군 밴드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의 대중가요는 "미8군"을 배경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 과정은 통과의례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만난 지인들을 통해 음악의 삶을 살기 시작했고 스무살, 신중현씨를 만나면서....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문영배집사님의 과거 경력을 다 정리하자면.. 오늘 밤이 새도.. 다 쓰지 못할것같아.. 중략하지만.. 그는.. 90년대 초반까지.. 대중가요의 세션맨의 한 사람으로, 드럼의 대표주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궁금하신분.. 옛날 음반 뒤져보시면.. 확인 가능합니다) 소위 "뜨는 가수"의 음반을 도맡아 하던 그가 돌연 세상음악을 버린 것은 1994년의 일이다.

왜?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세상 음악을 버렸다. 세상 음악이 아니면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그 결단은 더욱 단호하고 아름다웠다. 세상 모든 즐거움을 맛보았지만.. 생명을 찾을 수 없었음에.. 사라지지 않을 목마름에서.. 탈출하고싶은 욕심에.. 문영배 집사님은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한국 CCM계의 대 변혁. 그것이 그가 생각한 비전이고 꿈이었다.


#6.아브라조
아브라조라는 단어는.. 중남미지역 사람들이 하는 인사의 한 형태로 키스를 하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두드림..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그렇게 "아브라조"라는 이름을 내세운 첫번째 앨범을 내고.. 기독교 음악을 시작했다. 음반제작을 포함해, CCM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도 관여하면서.. 질적으로 수준높은 찬양을 만드는 사역에 함께 해왔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에 발매된 두 번재 앨범 "아브라조 2"는 그 꿈과 비전을 향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7.주님의 작업, 끝나지 않은 부름심.

5년전, 병원에서 신부전증이 있음을 알게됐다. 신장의 기능이 약해졌다는 진단... 조금 겁도 났지만 약물치료를 진행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긴장을 늦추고 살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주님의 부르심이었을까,.. 지난해 말, 문영배집사님의 건강은 심하게 악화됐다. 신부전증이 만성화가 되면서 일주일에 세 번 신장 투석이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된 것.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합병증으로 찾아온 시력 약화.. 결국 의사들의 부주의와 잘못된 오진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게 되셨다고 한다.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정한 사람에게 왜 시련을 주실까... 잠시 생각해본다.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 제대로된 CCM음반을 만들어보겠다는 욕심.. 그것이 부족했을까? 아니.. 어쩌면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주님의 완전한 도구가 되기 위해..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법칙. 그 주님의 법칙 속에서.. 철저하게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적도 끝나지 않았다. 필자가 취재를 가기 한 주 전에.. 병원에서 신장 기능 회복에 대한 한가지의 가능성도 전해들었다고 한다. 주님의 손길이 임한다면.. 모든 것이 다 새로워지지 않을까.. 몸도 마음도.. 그리고 그 어떤 사역에서도.. 주님의 기적이 함께하지 않을까..


#8.하나님의 선한 일꾼, 문영배와 김영숙

우연찮게 문영배집사님은 얼마전 러시아에 다녀왔다.
그리고 김영숙집사님은 꽤 오래.. 러시아를 놓고 기도하고 계셨다. 우리는 이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끝나지 않은 부르심. 아마도 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건 아니었을까. CCM음반 아브라조 3집의 방향도, 러시아라는 불모의 땅을 위한 기도도.. 육아와 가사와 가정 안의 모든 일들도.. 이젠 결정권을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할 뿐이다.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살기를 바라는 두 분의 참된 소망의 기도..
그 기도만이.. 잔잔한 아름다운 가정에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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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답죠...
이보다 더 행복한 이야기가 있을까요~하나님을 향한 몸부림...
참 아름다운 가정....하나님의 축복이 늘함께하시길...

우리 선생님의 건강을 두고 기도부탁드립니다...
14일부터 현재 수술을 앞두고 입원중이십니다.
오늘 선생님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월요일부턴 무균실에 들어가시기때문에 뵙지 못할꺼같습니다
수요일엔 수술을 하십니다...신장이식이라는 중대한수술...
기도부탁드립니다....
꼬옥,,,,짧게나마 이글을 읽고 지나가시는 분들...
한마디라도 그분께 간절히 외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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