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수 칼럼] 이원론적 신앙의 극복
▲주명수 목사(밝은교회 담임)
어느 크리스천 사업가가 한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교회 안에서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일주일간의 스케줄을 인용해서 말하였습니다. 월요일은 목사님을 모시고 운동을 하고, 화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목사님과 함께 교우들을 심방하고, 수요일 오후에는 교회에 나가서 제직회에 참여하고 수요예배를 드리며, 목요일 오후에는 심방을 하고 저녁에는 구역 예배를 인도하고, 금요일 오후에는 목사님과 심방하고, 철야 예배에 참석합니다. 토요일에는 역시 교회에 나가 청소도 하고, 주일에는 하루종일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이 간증을 들은 후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사업가인데, 그러면 일은 언제 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 좋고 나쁜 것을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나 교회에 관계되는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고 세상에서 일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그들은 믿음 생활과 사회 생활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생활과 세속적인 생활이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관은 성경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속과 세속주의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속과 세속주의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어떤 단어에 ‘주의(ism)’가 붙으면 그것이 붙지 않을 때와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공산’은 ‘필요에 따라 함께 나눈다’는 뜻으로 좋은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초대 교인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이라는 단어에 ‘주의’(ism)를 붙여 보십시오. ‘공산주의’(communism)라는 뜻은 ‘공산’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이 되어 버립니다. ‘공산주의’는 ‘공산’이라는 단어를 절대화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힘을 사용하여 서로 통용하도록 만듭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마귀’(demon)가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또한 마귀의 존재를 믿습니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devil)들도 존재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믿기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귀와 그가 부리는 귀신들이 존재하며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마귀주의’(demonism), ‘귀신주의’(devilism)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마귀주의, 귀신주의라는 말은 마귀의 존재를 절대화시킵니다. 귀신을 절대화시킵니다. 그래서 마귀, 귀신들이라는 안경을 쓰고 성경에 접근합니다. 성경에서 마귀, 귀신들의 존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신앙관이나 세계관에 있어서 지나치게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세속’이란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secular)은 그냥 이 세상입니다. 그 단어는 긍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오셨습니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디에서 사역을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선교사가 어디로 파송됩니까? 이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합니까? 이 세상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이 세속이라는 단어에 ‘주의’(ism)를 붙여 보십시오. ‘세속주의’(secularism)가 됩니다. 이 세속주의는 세속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세속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채 생활하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경계하여야 할 것은 세속이 아니라 세속주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속 가운데 일하는 것’과 ‘세속주의’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면 그는 마치 세속적인 사람으로 취급되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세상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를 가거나 선교사로 자원을 하면 마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고 세상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나 선교사로 지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세상 속에서 직장을 떠나게 된 동기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가 직장에서 하는 일이 세속적이라고 생각해서 신학교를 가거나 선교사로 가기를 결심하였다면, 이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받고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세속 가운데서 일하는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골 3:23). 교회 내에서 일하든 교회 밖에서 일하든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듯 자기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이원론적 신앙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아.. 정말 주께 하듯 해야 할 텐데..
그러면 이 게으름도 없어질 텐데..ㅎㅎ
집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