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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변함없이 싸워야됄 우리들의 문제인거 같습니다.
특히나 현재 제가 처하고 있는 문제에 가장 근접한 해결을 주는 글인것 같기도 합니다. ㅎ 읽어보세요 좋을겁니다.



오늘의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도 예수님께서 사도로 선택하신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팔았다. 사도 마태는 그가 대제사장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기 위해 흥정했다고 증언한다. 흥정의 결과로 은 삼십 개를 받았다. 이는 노예 한 사람의 값이다. 가룟 유다의 흥정은 예수님을 아주 헐값으로 팔게 되었고, 그 뒤로부터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게 되었다(마26:14-16).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더욱 혹평한다. 그는 예수님의 돈주머니를 차고 다녔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자주 예수님의 돈주머니에서 공금을 훔쳐내어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증언한다(요12:6). 사도 마태와 요한의 증언을 보면, 가룟 유다는 틀림없는 수전노(守錢奴)였다. 자기가 따르던 선생까지 노예 한 사람의 값을 받고 팔 정도로 돈을 너무 밝히는 파렴치(破廉恥)한 사람이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목적이 단순히 돈 때문이었을까? 다른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부 신학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목적이 무엇이었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가 돈 때문에 팔았던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 팔았든지, 그 중심은 하나로 귀착(歸着)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기록한다(요13:2).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마음을 왜, 어떻게 주었을까? 마귀는 가룟 유다의 개인적인 생각을 통하여 예수를 팔려는 마음을 준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은 태초의 범죄 이래로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을 우리는 원죄(原罪)라고 이해한다. 원죄의 속성은 개체에 영향을 미친다. 개체에 미치는 영향은 마귀의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창3:1-6). 따라서 가룟 유다는 마귀가 준 생각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았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여러번 주셨다. 우회적인 말씀(마26:21,23,24; 막14:18,20,21; 눅22:21,22; 요13:21)과 직접적인 말씀(마21:25; 요13:26,27)으로 그의 생각이 바꾸어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원하셨다. 그러나 끝내 그는 돌이키지 않았다.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요13:30).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일까? 왜, 그는 예수님의 곁을 떠나고 만 것일까? 왜,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격국 넘겨주고 만 것일까? 자기 생각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던지, 혁명에 대한 욕심이었던지 동일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내려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마귀의 지배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어리석음이란 항상 자기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과신(過信)하는 데서 비롯된다. 잘못된 자기과신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엉뚱한 판단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잘못된 판단은 자기가 세운 계획의 차질을 가져오게 되며, 그 일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계획이 성사(成事)되지 못한채 물거품이 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인 것이 의아(疑訝)할 뿐이었다. 자기 일신(一身)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유대의 당국자들이 온갖 거짓된 참소(讒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변명하지 못하시는 나약한 모습이었다. 결국 로마 정권에 속절 없이 죽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룟 유다는 무엇인가 크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뒤 늦게야 깨달았다. 후회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통감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로 미친 듯이 달려가 예수님의 몸값으로 받았던 은 삼십을 반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반납 받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핏값이니 네가 받으라고 했다.

가룟 유다의 마음은 지쳐 있었다. 더 이상 대제사장과의 논쟁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는 돈을 성소에 던져 넣은 채 물러가서 자살하고 말았다(마27:3-5). 누가는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기록한다(행1:18). 그의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유익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비참한 최후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그의 영혼까지 버림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죽음 직전이라도 영혼이라도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을 속단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야말로 속절없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가 불쌍하고 가련할 뿐이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판 대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늘의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오늘에도 가룟 유다는 있다. 그는 누구인가? 가룟 유대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열두 명의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다(마10:2-4; 막3:16-19; 눅6:12-16). 신임을 얻어 예수님의 돈 주머니를 책임지기도 했다(요13:29).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동안 예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놀라운 경험도 풍부했다(마10:1,8; 막3:14,15; 6:7; 눅9:1,2,6). 그런 그가 예수님을 팔았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가룟 유다의 일은 자기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주는 일이다. 임의적인 생각이나 열심을 내려 놓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참으로 가룟 유다는 자기 멋대로의 판단까닭에 예수님의 권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의 회개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뒤 늦게 깨닫고 통분(痛憤)하며 뉘우쳤다. 자살해야 할 정도로 사무치는 뉘우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께로 회개하여 돌이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기 생각을 내려 놓지 못했다. 자기의 아집을,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을 내려 놓지 못했기에 회개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마저 잃어 버린 것이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열심을 내고 있다. 그러나 그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오히려 그르치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되돌아 보라.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 되짚어 보라.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자기의 열정은 자기욕구의 충족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자기욕구의 충족을 위한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될 뿐이다.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다. 나의 임의적인 생각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열심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욕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 있다.

오늘 내 생각은 과연 주님이 주시는 생각인가? 내 판단은 주님의 뜻에 합한 판단인가? 내가 임의로 생각한 것은 아닌가? 내 멋대로 판단한 것은 아닌가? 내가 임의로 생각한 것이거나, 내 멋대로 판단한 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요,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이 주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내 생각과 판단을 행위로 옮기기 전에 말씀 앞에서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며, 다시 한번 깊이 생각의 싸이클을 맞춰봐야 한다. 내 속에서의 판단을 조용히 가다듬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기 위해 마음의 귀를 열어 놓아야 한다.

나의 모든 생각과 관점을 내려 놓으라. 오직 주님의 생각과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라. 주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들은 철저하게 포기해야 한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여겨져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주님의 생각과 관점에 일치되지 못한 모든 생각과 관점들의 결국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른 분별력을 구하는 것이다. 주님에 의해서만,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항상 귀기울이고, 자신의 지식이나 상식을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들에게만 들을 수 있는 은총으로 함께 하신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뜻과 주님의 관점을 가질 수 없다. 자칫하면 마귀가 주는 생각과 판단의 블랙홀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룟 유다의 행위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녕 오늘의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그는 자기의 생각과 관점을, 주님의 생각과 관점 아래에 내려 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의 열정으로 무모한 일속에 파묻혀 사는 일 중독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가룟 유다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의 뜻을 온전히 알기 위해 힘쓰며, 그 뜻에 자신을 생각과 관점을 맡기는 여유로움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일의 실적이나 결과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과정이나 태도라 하겠다. 하나님은 일하는 자의 과정이나 태도를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 자기의 임의적인 생각이나 판단으로 일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임의적인 생각이나 판단을 내려 놓고, 오직 주의 말씀에 항상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자세로 일하는 자를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2007. 1. 14 (주일)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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