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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영 2007.09.20 21: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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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즈니스를 통한 자비량 선교 시대
글쓴이: 사도바울


제목 : 자비량 선교시대  
지금은 비즈니스를 통한 자비량 선교 시대

상황에 적합한 선교 전략의 다양화와 후원금 조달 창구의 다변화를 가능케 한다

남아공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GECOWE '97)의 여러 이슈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비즈니스를 통한 세계선교 전략이었다. 자비량 선교도 그 중 한 분야로 지목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일고 있는 자비량 선교사 운동과 관련하여 비즈니스 선교전략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비즈니스 선교, "참신해"

대부분의 목회자나 목사 선교사들에게는 자비량 선교나 비즈니스 선교는 별로 시선을 끌만한 주제가 아니다. 사실 그 방면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돈에 신경 안 써도 후원기관에서 매달 보내오는데 구태여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이야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석에서 자비량 선교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한 선교사는 그런 얘기하면 성도들이 선교 헌금을 안 하게 되니 결국 선교를 가로막는 것이라는 이색적인 평가를 하였다. 주변의 서구 선교 단체들의 경우에는 선교 모금을 교회라 고하는 단선 채널이 아닌 여러 형태의 모금 채널을 오래 전부터 융통성 있게 가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OM의 둘로스 선교선이나 YWAM의 의료선교선인 Mercy Ship에서는 선교사들의 선교비만으로는 선교선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나 선교사를 통한 후원은 물론 배에 책이나 물품을 전시하여 전문적인 장사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책을 기증 받거나 아주 저렴한 값에 사서 매매하여 배 운영비의 일부로 충당한다고 한다. 이곳 한 독일 선교기관에서는 양돈을 하여 선교비의 일부로 사용한다고 하며, 이 지역에 있는 임마누엘 미션이라고 하는 미국인 선교단체에서는 일반 소매 잡화상을 경영하여 선교비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다.

자비량 선교가 선교비 후원 방법론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 전략의 목적은 선교인데 자립 선교의 접근 방법을 비즈니스로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비량 선교보다 좀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며 전문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요즘은 자비량 선교를 '전문인 선교'라고 말해 선교사의 자격 요건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결국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론과 궤도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론은 상황에 적합한 선교 전략의 다양화, 교회를 통한 후원만이 아닌 선교비 후원금 조달 창구의 다변화라는 점에서 참신함을 제공한다.

한국 선교, 규모에서는 강국

항간에 자비량 선교, 내지는 전문인 선교라고 하면 평신도 선교사들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이런 선교가 마치 일반 평신도들의 전유물인 양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자비량 선교사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구태여 현대 교회의 직분이라는 틀로 본다면, 평신도라기보다는 목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선교 현지에서 보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경우 몇몇 자비량(Self-supporting)을 표방하는 선교단체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자비량보다는 아예 후원 교회나 선교 기관을 통해 선교비에 의존하는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전문 직업적인 자격을 갖추고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든 평신도 선교사는 거의 찾기 힘든 실정이다. 또 한국 교회가 아직 비즈니스 선교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여 자칫 "선교사가 먹고 살려고 장사한다더라"고 악평을 할 수도 있다. 선교기관이나 교회를 통한 선교비의 후원이 충분하다면, 어떤 면에서 수익성 사역을 벌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본다. 위에서 본 서구 단체들도 사역에 필요한 선교비를 충당하기 위한 대안으로 비즈니스를 접목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분들은 한국교회 선교가 평신도 선교사들이 선교의 주도권을 쥐었더라면 지금의 선교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하는데, 한편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일방적으로 동의하기는 곤란하다. 다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나 평신도 사역자가 선교 현지에서 정착할(survival) 자기의 전문 직업적인 달란트도 변변치 않고, 이렇다 할 신학적·선교학적인 소양의 과정도 없이, 심지어 교회 일반적인 봉사 경력도 거의 없으면서 목사 선교사의 권위도 무시하고 그의 사역을 기웃거리거나, 흉내를 내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다시 글머리로 돌아가 GCOWE'97에서 또 한 가지 강한 인상은 세계 선교는 그 나라의 국력과 함께 간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한국 교회의 선교는 한국의 국력을 반영한다. 아직도 미국, 영국, 캐나다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한국 선교가 4위를 마크하고 있다고 한다. IMF 이후 자세를 다시 가다듬은 한국 선교는 규모 면에서 영적인 강국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세계 선교 전략이라는 면에서(여호수아1장) 세계를 가슴에 품고 지상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한국교회 위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필요한 물질을 쏟아 부어주실 뿐만 아니라 한국이 처한 정칟경제·사회적 그 어떤 위기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공급하시리라 믿는다.

비즈니스 선교는 성경적이지 않다?

비즈니스에 대한 비성경적인 견해는 그리스의 철학 이원론에서 보듯 영적인 것, 또는 정신적인 것은 좋고(Good)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좋지 않다(Bad)라든지, 우리나라의 유교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도 그 근저에는 일에 대한 귀천을 둠으로써 결국은 일하는 것을 기피하게 하거나 태만에 빠지도록 하는 배경이 되어 왔다.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세계 사람들의 모습 역시 대체로 일에 대한 분명한 윤리적 개념이 없거나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이 땀 흘리기를 싫어한다. 이곳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무렵 이곳 흑인 목회자들이 대뜸 "당신이 우리에게 뭘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의 눈엔 선교사의 얼굴에 달러가 뒤룩뒤룩 붙은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돈이 없다. 대신 가장 귀한 영의 양식, 성경을 같이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한 1년여를 같이 공부한 한 목사는 "우리는 생선을 요구하였는데, 당신은 생선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라고 하였다. 최근 한 목사들의 모임에서 해외로부터 어떤 원조를 바라면서 "아프리카의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지만 우선 영적인 면에서, 특히 성경에서 그 핵심 열쇠를 찾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다. 얼마나 많은 물건의 컨테이너를 쏟아 부어야 이 가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본질적으로 죄된 인생이 일하기 싫어하며 게으른 심령이 말씀 앞에 변화되지 않는다면 대안이 없다"고 잘라 코멘트하였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의 이미지를 닮은 창조적인 인간을 만드셨고 에덴동산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며 경영하도록 하셨다(창 1:28,2:15. Work it and take care of it).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 3:17~19)라고 말씀하셨다.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제를 내걸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일하라는 것이 신적 소명(神的 召命)이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그 이유가 있고, 못하는 사람도 그 이유가 있듯 부자나 가난한 사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최초의 비즈니스 선교사(tentmaker)로서 사도 바울은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경제적 후원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눅 10:7, 딤전 5:18) 복음을 위해 열린 삶의 태도를 견지하였고(고전 9:18~23)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폐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고후 11:7~9, 12:13~16) 최선의 비즈니스로 그의 선교비를 충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박한 재림론을 구실로 무위도식하는 많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며 분명한 기독교 노동 윤리를 제시할 때, 복음대로 근면과 성실을 실천하는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년 전 우리 작은 농장에 소 15마리를 방목한 적이 있었다. 한국의 축산 농가로 볼 때 부업 정도의 규모다. 그러나 일거리는 매우 많다. 매일 쏟아내는 소 오물 처리, 풀밭을 점령해오는 가시덤불 제거하기, 울타리 보수작업, 물 끌어올리기, 질병의 예방을 위해 정기적으로 소독하는 일, '그저 방목하면 저절로 잘 커서 선교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리라'는 당초의 단순한 발상은 큰 착오였다.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없다.

당시 우리의 사역 중 평일에 공립학교순회 예수영화를 주4회 가량 하고 정기적인 목회자를 위한 성경 공부 반을 운영하고, 나머지 시간은 밤에는 공부하고 대부분 낮에는 노동을 하게 된다. 소득은 별로 되지 않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 농장 일의 생리다. 무엇이나 전심전력으로 하지 않으면 소득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험하였다.

사도 바울이 밤낮으로 전력투구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현지인 동역자와 함께 땀을 흘리기 때문에 동역자들도 땀 흘리는 일에 기꺼이 동참한다. 가끔 "뭐하느냐"고 묻는 현지인들에게 손바닥에 박힌 괭이를 대답 대신 보여준다. 전도하다 매 맞은 영광스런 상처는 아니지만 이것도 열심히 주의 일하다 얻은 정직한 흔적이라면 틀린 말일까.

'Tentmaker'에 대한 정의를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세속 직업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복음 전도자로 특별 신적 소명을 받아 타 문화 권에서 그 직업으로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만들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위임 받은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Role of tentmakers: evangelist, disciplers, humanitarian & professionals, as a job taker, job creator). 여기서 우리가 흔히 교회의 목회자를 말할 때 전임사역자 (Full time worker)냐 아니냐(Part time worker)를 논하는 것처럼 이런 탠트메이커는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선교의 삶의 자세가 달라진다.

국내에서 구태여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에게만 국한하여 전임 사역자론을 강조하는 이유를 잘 알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신분과 직업이 무엇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삶의 현장(Marketplace)에서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의 전임 사역자(Full time worker)가 분명하다. 목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전임사역자요, 직장인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전임사역자요, 학생은 배움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전임사역자다. 탠트메이커 역시 두말할 여지가 없이 타문화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전임 사역자다.

복음과 비즈니스가 만나

선교사의 경우는 어떻게 그 재정적인 필요를 채울 것인가? 이곳 흑인 목회자들은 대부분 아주 재정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다. 50~100명 정도의 교인라 해도 한 주 헌금이 1~2만 원도 못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가 일거리를 찾아 이런 일 저런 일을 기웃거려야 하고, 설교 준비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인들은 일거리가 있는 목회자는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한번은 흑인 목회자 훈련 반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일반 직업 없이 목회만 전념하면 굶어 죽는 판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답을 성경에서 찾는다. 전도자로서 사도 바울은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장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그의 재정적인 필요에 대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마 10:10)고 천명한다. 이 말씀을 리빙바이블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the Lord has given orders that those who preach the Gospel should be supported by those who accept it."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마땅히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교인들을 잘 양육하여 교회로 하여금 교역자의 생활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렇다면 선교사의 경우는 어떻게 그 재정적인 필요를 채울 것인가? 이 원리는 선교사도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교회가 그 사명 수행을 위해 파송한 선교사에 대해 교회나 선교단체(sending body)가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꾸어 말하면 일차적으로 고용하여 파송 또는 임용 주체가 선교사의 생활이나 사역에서 발생하는 재정적인 책임(supporting body)을 감당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그만 두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재정 문제인 것을 보면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선교사가 재정 걱정 없이 사역을 전개할 수 있다면 크나큰 축복이다. 최근 한국 교회는 여러 문제로 교회 부흥이 주춤하고, 아직도 85%가 교회 선교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선교 헌금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선교 필드에 있는 일선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를 통해 경미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교회로 하여금 선교에 등을 돌리게 한다는 소리 없는 채찍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필요하다면 상황에 따라 교회의 후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밤낮으로 노동을 하겠다"(살후 3:7~9)는 거룩한 자존심, 희생적인 본 등은 과연 비즈니스 선교를 통해 가능할까?

말은 대단히 쉽지만, 비즈니스의 세계는 갈수록 치열한 경쟁을 부채질한다. 국내에서 벤처 기업을 창업하여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해 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타문화 권에서 비즈니스에 성공하는 일이란 더욱 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현실이다. 거기에 선교를 감당해야 하는 또 다른 특수 임무를 생각해보라.

금세기 선교 전략의 하나로 각광을 받는 이 비즈니스 선교는 가장 난이도 있는 접근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군대로 비유한다면 적지에 투하되어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공수특전단이라 할만하다. 특공대가 고난도의 사명 수행에 필요한 그만큼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태어나듯, 비즈니스 선교는 한번 사는 인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전략적인 삶을 살기로 헌신을 생각한 사람이라면, 어려서부터 목표를 확실히 세우고 잘 준비하여 한번 도전해 볼만하다.

선교사는 이민자다

비즈니스 선교는 직업선교라 할 수 있다. 어떤 분야의 전문적인 자격증과 경험을 구비한 전문인으로 타문화 권에서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자본으로 현지에서 기업을 창업·인수하여 사업을 경영해 나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제3세계는 값싼 노동력은 많지만 고급인력이나 자본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비자(Visa)를 획득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본적으로 선교사는 이민자(immigrant)이고, 다른 일반 이민자들과 동일하게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사실 비자는 어떤 면에서 선교사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비즈니스 선교 입장에서 보면 창의적인 접근 지역이 아닌 유학생 비자로 임시방편을 삼고 있다.

본국 업체의 해외 지사나 해외의 법인체 또는 비영리법인(NGO)을 통해 고용비자(Work permit)나 영주권으로 합법적인 거주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영업을 할 경우, 그 나라의 법이 허용하는 투자 이민 절차를 밟아 비자를 취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 역시 현실적으로 복음 증거를 위해 전략적인 삶을 살고자 이민의 모험을 감행하여 첫 관문인 사증을 취득해야만 한다.

보통 현지 법인체(Receiving body)에서 어떤 특정인의 고용 비자를 청구할 때 '현지인을 고용하지 않고 왜 해외로부터 인력을 수입하여 고용해야 하는지'를 관심 있게 묻는다. 현지인들이 가능한 직종이라면 그 나라에 와서 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자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을 외국인이 들어와서 똑같은 일을 한다면 자국인 한 사람이 일거리(job)를 잃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나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직종이거나 보통의 일이라도 국내에서 아주 탁월한 기술자로 입증이 가능하다면, 아마 세계 어디서나 어느 정도는 환영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민을 가려는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서 요건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남아공 같은 나라에서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제1요건은 "후원금이 충분하고, 낙후된 흑인 지역 사회에 얼마나 공헌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둔다. 한편 자영업을 할 경우, 예를 들어 흔히 태권도사범, 한식 요리사 등은 사실 한국인이 아니고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직종이기 때문에 고용비자를 쉽게 취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지인 고용 창출도 다소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본다. 기타 정보산업 관계나 가급적 2차나 3차 산업 부문 등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자격증 내지는 경험과 학사 학위 이상의 학력도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전문 자격증을 구비하고 일정한 자본금이 있는 비즈니스 선교사라도 가능하면 영적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신학 과정과 선교단체의 일정한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어떻게 두 비즈니스의 성공적인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다. 타문화권 속에 복음을 들고 들어가 생활로 보여주는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발상이 아니라 좀더 복음을 농도 있게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망이다. 어떤 면에서 이 점이 비즈니스 선교가 극복해야 할 한계가 아닐까. 만약 후원금을 어느 정도 받는 자비량 선교사라면 얼마만큼 원활하게 지원되는가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역의 무게 중심이 융통성 있게 이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아프리카 땅에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아예 농장을 주거지로 선택하였다. 만약 선교비가 중단될 위기상황이 발생하거나 나이가 들어 병약하거나 은퇴할 시기에는 전혀 오갈 데도 없는 선교사 케어 시스템 하에서 언제든지 서바이벌 할 수 있도록 그 방면의 준비를 나름대로 해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IMF가 터졌다. IMF 이후 후원금이 보통 기준에서 절반에도 못 미치도록 뚝 떨어졌고, 후원 교회 역시 항상 하는 말이 "너무 어렵다"며 되레 선교사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미전도 지역이 아니어도 좋아

아직 비즈니스 선교를 말하고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고, 국내에서 과연 이런 행태의 수익성 사역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이해해 줄지 의문이다. 어떤 선교단체에서는 아예 규정으로 수익성 사역을 금지시킨다. 후원기관에서 사역비가 충분히 영달되는데 선교 사역에만 충실하지 않고 세상일에 한 눈 파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책임감 있는 후원기관이라면 상당히 일리가 있다.

선교사가 비즈니스로 비교적 접근하기 용이한 것이 농업 쪽이다. 일반적으로 1차산업 부문은 많은 자본이나 기술이 없이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여타 산업에 비해 이윤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 흠이다. 축산은 양돈이나 양계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으나 사료 값에 따른 생산성이 불확실하다. 비육우 방목은 목초지만 잘 조성되어 있다면 한 사람이 보통 50마리 이상씩도 돌볼 수 있고, 사역적인 측면에서도 거의 지장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매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아마 2차나 3차산업 쪽은 더 박진감이 있고 흥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기도와 더 깊은 통찰력이 요구된다. 이런 비즈니스 선교는 소수의 목사 선교사와 각종 기능을 가진 다수의 평신도 사역자들이 한 팀이 되어 합력한다면 좋은 선교 팀이 되지 않을까. 물론 목사 선교사라도 자비량에 꿈을 가지고 일정한 기술이나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을 습득하고 준비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목사 선교사는 직접 선교나 기업선교 등 영적 공동체 운영에 관여하고 평신도 사역자들은 목사 선교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면서 기업 경영에 최선을 다하고, 휴가 기간에 직접 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통 자비량 선교사들이 일반적으로 선교사가 들어가기 힘 드는 곳, 이른바 창의적인 접근지역을 주무대로 간다. 드러내놓고 복음을 전할 수 없으므로 어떤 직업이나 공부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경우로 봐야 하며, 재정적인 면까지 자비량하라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물론 현재 자비량하면서 선교를 잘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선교사 신분으로 활동하기 힘든 곳은 차라리 '마게도냐의 환상'이 분명한, 일반 정규 선교사로 하여금 상황에 맞게 잘 훈련하여 투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량 선교사의 이민은 어쨌든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가급적 어렵지 않은 선교지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꼭 미전도 종족이니, 창의적인 접근지역이 아니라도 비자를 잘 받을 수 있고 생활 환경, 교육 환경, 비즈니스 환경도 어느 정도 괜찮은 곳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몇 년 전 아프라카 몇 나라를 여행하며 자동차 정비를 하는 한 자비량 선교사를 만났다. 당시 아무런 후원도 없으면서 한국에서 쓰던 중고 자동차정비 자재를 들여와 열심히 일(self-supporting)하면서 한인 교회를 돕고 있었다. 지금은 규모가 확대되어 자동차 정비 훈련 센터를 하며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데, 그야말로 이름도 빛도 없이 복음을 위해 사는 참 귀한 선교사라고 생각하였다.

거창하기만 한 '단기선교 여행'

최근(2005.4.7)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2006년 세계선교대회·선교전략회의(NCOWE VI)' 간담회에서 2020년까지 5만 명 정규선교사 및 1백만 명 자비량 선교사를 세우기 위한 초석을 마련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 아직 세안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혹시라도 5만 명의 정규 선교사와 1백만 명의 자비량 단기선교 여행팀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또는 혹시 도전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한번 흘려보는 선교 구호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현장을 너무 안이하게 얕보는 탁상공론은 아닐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비량이라는 이 고난도의 선교를 아무렇지 않게 식은 죽 먹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한국 선교 전략의 한 단면이 아닌지, 또는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려는 선교 영웅주의적 발상이 아닌지 묻는다.

삶의 다른 질을 찾아 타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치밀한 사전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면서 낯설고 물 설은 땅에 성공적인 안착(survival)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흔치 않게 본다. '훈련소에서 열심히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연습한 병사는 전쟁터에서 피를 덜 흘린다'는 말이 있듯이 선교사 이민은 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호락호락한 아이성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비즈니스의 힘>(H. Suter & M. Gmur. "Business Power for God's Purpose")이라는 책에는 "역사적으로 사도 바울에 이어 6,7세기 경 실크로드를 따라 네스토리안(景敎) 상인들이 복음을 실어 날랐고, 18,19세기에는 모라비안과 바젤미션 그리고 독일의 프레드릭 등을 대표적인 크리스천 비즈니스맨으로 예시하면서 과거 2천년을 통해 무역과 비즈니스가 기독교 신앙을 크게 확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만약 지구촌마다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이 많은 평신도 사업가들이 아니었다면 이 복음은 지리적으로나 사회 계층적으로 결코 멀리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 이 땅의 용기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여, 믿음으로 기도하며 차근차근 하나님의 부르심의 삶을 설계해보자. 현재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 기도회,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 활동, 전도 활동, 구역 예배, 성도의 교제, 각종 봉사활동 등 모든 프로그램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교 훈련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보자.

세계 선교를 위한 부르심이 분명하고 확실하다면, 더 이상 가슴에만 품고 있지 말고 더 넓은 세계로 한 발자국 나아가 보자. 한번 주어진 인생을 예수를 위해 전략적인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단단히 준비하고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신 동서남북의 모험 세계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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