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손상률 원로 목사)
예람지기 2010.06.06 10:53:39
1986

 

동족상잔의 흔적

 

 

1965년 초 나는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도사로 부름을 받았다. 전라남도 무안군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교회가 나의 첫 사역지이다. 교인 수는 어린이들 열댓 명과 어른들 20여명이 전부였다. 어른들 중에는 남자 집사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여자들이다. 40대의 부인들과 60대 이상 되는 노인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에는 좀 특별한 사연을 지닌 가족들이 있었다. 시어머니와 세 사람의 며느리 그리고 손주며느리까지 모두 남편이 없는 홀어머니들이다. 6.25가 일어나고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경남 일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이 적치하에 들어갔을 때다. 그 지역에도 석 달 동안 인민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교회의 주축이 되는 이 집안에는 당시 면서기, 학교교사, 면의회의장 등 마을에서 존경받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많은 가족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하게 되었다. 이 집안에서 모두 열한 명이나 희생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끌고가 총살을 하고 한꺼번에 구덩이에다 묻었다고 했다. 그 가족들은 세월이 암만 흘러도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느 집사가 나에게 하소연을 하면서 자기의 남편과 가족을 죽인 사람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데 생각할 때마다 분이 치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그것을 삭이며 살기가 힘이 든다고 했다.

 

최근 어느 일간지에서 한국전쟁 60주년 특집으로 “내가 겪은 6. 25”라는 기획물을 내 보냈다. 전북 고창에 사는 김차순이라는 할머니는 고향에서 아버지가 먼저 총살당했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다섯 동생을 남노당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구덩이에 밀어 넣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전쟁을 모르고 자라 난 세대들은 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 시대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몇 세대가 지나가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요 아픔의 흔적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최근 북한 어뢰에 의하여 46명의 젊은이를 죽게 한 천안호 폭침 사건을 보면서 이 땅에는 아직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