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黃喜) 정승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 있는 선비들과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지만 황희 정승은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명의 임금을 받들며 30년간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名宰相)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는 임금의 귀가 어둡지 않도록 지혜롭게 간(諫)하였으며 백성을 자애롭게 보살폈고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사를 하는 데는 원칙을 준수했고 어떤 경우에도 공과 사가 분명했으며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淸白吏)의 모범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황희와 관련된 일화 가운데는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제자를 사랑하고 인물을 키우는 데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중에도 김종서(金宗瑞)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했다고 한다. 세종대왕 시절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하루는 맹사성(孟思誠)등과 함께 빈청에서 늦도록 정사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육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제수받은 김종서가 나이 많은 정승들이 정무에 노심초사 하는 것을 보고 예빈사에 연락을 해서 점심상을 잘 차려 올리도록 했다. 이를 본 황희는 김종서에게 성난 목소리로 “예빈사는 국가의 공적인 행사에 음식을 마련하는 곳이거늘 대감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으니 상감께 주청하여 엄벌에 처하도록 조처하겠소”라고 호통을 쳤다. 또 한 번은 김종서가 몸을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황희는 아래 사람에게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한쪽 다리가 높은 것 같으니 목수를 불러서 맞도록 잘라 주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곧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고 이후로는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종서는 일찍부터 전쟁터를 누비면서 오랑캐를 척결하는 등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장군이었지만 언제나 황희 정승 앞에만 서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한편 맹사성 대감은 황희가 유독 김종서에게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혹시 김종서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황희의 대답은 “우리가 죽고 나면 안심하고 나라를 맡길 인물이 김종서 밖에 또 누가 있는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