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李基豊)과 제주도 선교 (3) 서양 선교사들 중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이기풍목사의 부인 윤함애사모에 관한 글을 반드시 기록하곤 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최초 7인 목사 중 한 분이었고, 처음으로 총회가 파송한 제주도 선교사였으며 제10회 총회장을 역임한 교회사적인 인물이 되기까지 소리 없이 내조한 부인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윤함애사모는 황해도 안악에서 이름난 윤진사댁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양반가정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열다섯 살 때 원인모를 병에 걸려 온 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나고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가 뼈만 남은 시체처럼 되었다. 집에서는 귀신이 들렸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좋은 의원을 다 찾아다녔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방안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죽음만 기다리는 지경이 되었다. 그때 마침 언더우드(H. G. Underwood)선교사의 조사였던 김채봉씨가 전도차 그 마을을 지나다가 윤진사댁 딸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왔다. 김조사는 병자를위해 기도를 하고는 귀에다 대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윤함애사모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등불을 비춰주는 환상을 보았는데 순간 몸이 화끈해지더니 손과 발이 움직이고 자리에서 뻘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 놀라운 신유의 체험과 함께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처녀가 서양귀신에 홀렸다고 핍박을 하며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1895년 섣달 그믐날 야음을 타서 집을 빠져나와 무작정 평양으로 올라갔다. 남자의 복장을 하고 걸어서 보름 만에 평양에 도착하여 말만 들은 마포삼열 선교사 댁에 찾아갔다.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오른 발로 거기까지 찾아온 소녀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마포삼열 선교사는 그를 이길함(J. s. Gake)선교사에게 소개해 주었다. 캐나다 선교사인 이길함목사는 그를 양녀로 삼아 숭의여학교를 졸업시켰다. 윤함애는 7년 동안 선교사의 집에 살면서 서양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수준 높은 생활문화를 익히게 되었다. 스물다섯 살에 선교사의 권유로 이기풍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가 제주도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미개한 주민들의 생활개선과 교육에 눈을 뜨게 하였다. 의료시설이 열악한 그곳에서 여성들이 해산할 때 아기 받는 산파로 활동을 하였고, 제주 영흥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이바지 하는 등 제주도 개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