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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24:5-8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자매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십자가의 길과 무덤까지 찾아 갑니다. 예나 오늘이나 순전하게 주를 따르는 제자들 중에 자매들이 많습니다. <부흥의 여정>이라는 작업을 하면서 역사상 일어난 '부흥'의 이면에 순수한 작은 자매들의 헌신이 항상 밀 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여정에도 그런 자매들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드러나고 보이는 것만을 보고 믿으려 하면 깊이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헌신적으로 따랐지만 여전히 주의 죽으심을 슬퍼하고 절망할 뿐, 부활에 대하여는 제자들처럼 믿음이 없었습니다. 비둘기같은 순수함만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안목과 방향을 가져야만 합니다. 말씀에 대한 예수님과 같은 철저한 지식과 그 반석위에 서는 것,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 무덤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거기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것을 생각도 못하고 그것을 누가 훔쳐갔나 하고 다시 슬퍼할 때에 천사들이 나타나 이 말을 했습니다. 천사들은 그 신실한 자매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분명하게 이스라엘과 인류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고, 자기 몸을 버려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것을 이루실 것을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자매들도 그 말씀을 들었지만 진정으로 믿음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심령과 삶을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절망, 자매들의 슬픔은 그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 해도 말씀이 그 안에 살아서 역사되지 못하면 절망하고 결국 넘어집니다. 여기서 '기억하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너무나 중요한 본질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아버지의 강력한 요구였습니다. 나는 한 때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화답하라"(엡5:19)는 말씀을 탐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성경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예전부터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예배와 권능의 본질인 "신령한 노래"를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초대교회의 무엇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의아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지금의 우리와 사뭇 다릅니다. 베드로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행3:6)했던 그 말에는 초대교회가 소유한 성령의 권능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권능을 탐구하면서 그들이 가진 기름부음과 우리가 소유한 것들의 극명한 차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간 흉내를 낼 뿐 그 본질적 능력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못자국처럼 너무나 선명한 진리와 능력의 실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그 의문의 수건 안에 감추인 그리스도의 영광, 권능을 만져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령한 노래입니다. 그것을 연구하면서 놀란 것은 그것이 초대교회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예배 가운데 있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대상25:1 다윗에게는 전쟁을 위해서 군대 지휘관들만이 아니라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예언의 노래'(대상25:2)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미 구약에서 수없이 나타난 본질임을 깨닫고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내가 성경을 너무나 모르는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천둥처럼 나를 때렸습니다. 이 신령한 노래들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과 예배를 위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율법과 언약에 정통한 바울은 그 영적인 본질로서 초대교회가 찬양하기를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노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6 바울이 말하는 '모일 때'라는 것은 그들의 예배를 말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심지어 예언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배를 연구한 자료들을 살핀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의 예배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대부분 가정교회 형식으로 모이는 그 예배에 춤이 있고 성찬, 식사가 있고 치유와 예언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이들이 그런 예배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천사들이 자매들에게 말한 "그 말씀을 기억하라"라고 한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그 안에는 예수님에게 연결되는 '구속사'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천사라는 존재들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중요한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다윗은 그 천사들의 중요한 사역을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시103:20)라고 말합니다. 시편103편 19-21절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매우 중요한 계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 가운데 천사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라고 보낸 영(히1:14)들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하고 행하는 자들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 주신 율법이 '천사들이 말한 것'(행7:38)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하늘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이 말한 "기억하라"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속과 연관해 가장 중요한 전언(傳言)이었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 신7:18,19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1,2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소와 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 신16:2,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수1:13 저는 성경에서 수백 개의 "기억하라"는 말씀의 발견했는데, 그것도 다 찾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중에 생각나는 몇 구절만 적었습니다. 이 '기억'을 주제로 신학연구를 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후에 주신 율법과 절기들, 제사의 모든 본질은 이 "기억하라"는 명령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기념하라"(충13:3)와 "기억하라"는 같은 의미인데, 그것은 단지 생각, 추억, 잊어버리지 않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기억'은 과거를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적 순종'을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의 사유에서 '기억'은 '복종 안에서의 행위'와 깊이 연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순종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고 명확히 그 언약들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삶은 바로 그 언약을 명확히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여러차례 가서 촬영하며 기도 가운데 말씀을 탐구하는 동안 그 순종이 얼마나 철저한지 눈물이 다 날 정도였습니다. 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27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24:44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의 뜻, 계획을 명확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삶은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것을 구체화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히10:5-7 이것이 진정 성경이 말하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 양 되심'과 '십자가의 복종'은 이 언약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어진 율법과 절기, 제사, 그리고 구속의 언약들은 모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 양 되심'을 명확히 기억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여러번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유월절의 그 밤에, 떡과 포도주로서 그것이 곧 주님의 몸과 피를 내어 주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기념하라"하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셔도 제자들은 고개만 주억 거릴 뿐 진정한 믿음으로 서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 보다도 슬픔과 고민의 세상 염려가 그들의 심령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율법과 성경을 탐구하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그렇게 제사와 절기를 지키면서도 그 본질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가리워 졌고 듣지 못하는 불구였습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을 이루시는 것으로 진행됨니다. 바로 성경이 말하는 "기억하라"의 본질입니다. 단지 머리로 이해하고 지적인 동의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진실로 말씀을 새기고 어떤 환경, 공격, 문제 가운데서도 그 믿음의 반석위에 서는 것이 '기억하라'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눅24:6 제자들의, 자매들의 이 극한 절망과 슬픔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들었지만 그 진리가 그 영과 삶에 굳건한 반석으로 자리하지 못했습니다. 적당히, 막연하게 그 정보와 지식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밀까부르듯이 압박하고 공격하는 사단에게 쉽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제가 이토록 이 부분을 장황할 정도로 다루는 것은 바로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것을 순종하지 못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재림을 진정으로 예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처음 오심'(初臨, first coming))만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초림만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놀란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신약성경 260장 전체에서 무려 318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구약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과 약속이 초림보다도 재림(Second Coming)과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의 예언과 말씀이 신약에 거의 나온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합니다. 성경을 그만큼 온전히, 깊이 연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이 구약(타나크)에 예언된 그것을 인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종말의 징조와 예언들을 나름대로 연구한 많은 이들이 놓친 부분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구약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재림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저 교회의 현실과 이 시대적 상황만으로 그것을 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온전히 기억하는 작업에서 본질적 정확성을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수없이 당부하신 자기들의 죄를 속하시는 '어린 양'으로 오실 메시아를 믿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 열방을 하나님 공의와 진리로 다스릴 영광스런 왕의 통치자로 임하시는 메시아만을 보고 구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좀 더 세밀히 다룰 부분이지만 그들은 메시아가 두번 오실 것이라는 성경의 언약을 깨닫지(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과 현실과 틀, 역사적 경험에 묶이어 그 언약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 자신, 우리 교회도 역시 어린 양 예수님으로 계시되고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초림에만 거의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음에는 '성령의 강림'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증거한 복음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라면 재림에 대하여 부인하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에서 읽었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진리가 명하는 재림의 때를 기억하고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비해야만 합니다. 제자들도 신실한 자매들도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여러번 들었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심령으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믿음위에 서지 못함이 베드로 같은 자가 작은 시험(卑者의 말)앞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게 했습니다. 성경은 부인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마26:74)라고 가슴 아픈 기록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세번 울자 그 때서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마26:75)고 합니다. 그 전에 유월절의 그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하자 ,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獄)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22:33)라고 베드로는 강하게 맹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맹세가 무색하게도 "네가 알기 울기 전에 세번 부인할 것이다"(눅22:3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나 자신이 생각되어졌습니다. 나도 베드로처럼 아골골짝 빈들에도 소돔같은 거리에도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 안고 찾아가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겠노라 어릴 적 부터 뜨거운 심장과 눈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나에게 틈입(闖入)한 작은 영적 공격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실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던 자입니다. 닭이 세번 울자 그것을 생각하고 기억했습니다. 누가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2)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문득 생각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의 재림과 심판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시면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마22:13)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같이 하나님 나라에 부르심을 입은 자도 그런 어둠 속의 찢어지는 고통과 슬픔을 겪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 받은 자는 적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함부로 판단하기 무엇한, 쉽지 않은 믿음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적당한 이해와 신앙으로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해 있을지 누구도 장담 못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그 말씀들을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6.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7:22-27 갈릴리에서 하신 이 말씀의 '그 때', '그 날'은 '추수의 때', '마지막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말을 듣고 준행해야만 '창수'와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게 됩니다. 창수와 바람은 성경에서 전방위적인 음부의 세력과 영적 공격을 상징(시18편)합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파었도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였도다 삼하22:4-10 예수님의 말씀음 다윗의 이 시를 깊이 기억하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시는 주님의 강림과 환난 날의 고난, 승리를 구체적으로 암시합니다. 베드로는 작은 창수에 무너지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자였습니다. 이 '집'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하신 것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창수와 바람의 '음부의 문'을 대적하고 이기는 주님의 교회일까요? 주님처럼 그 말씀을 듣고 철저히 준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흔한, 상투적인 순종에 대한 표현이 결코 아니니다. 피흘리기까지 싸워서 획득해야 할 영적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토록 주를 따랐지만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믿음없음'과 '마음이 완악함'을 책망 받았습니다(막16:14). 마음이 완악함에 대하여 탐구하다가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15:22,23 이것은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처음 왕인 사울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가 왕위를 빼앗기는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에게 주는 교훈은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왜 사울은 그토록 높은 왕이라는 신분에서 실패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지 않아서 입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나가서 싸우긴 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심령 깊이 언약으로서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명령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하는 그릇이요 체질입니다.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아각왕과 좋은 소와 양들을 죽이지 말고 하나님께 제사하는데 쓰라고 하자 그렇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그럴듯한 소리와 상황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어찌보면 사울은 가혹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탐구하다가 두려움마저 드는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25:`17-19 놀랍게도 하나님꼐서 르비딤 광야에서 "아말렉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에서의 후예로서 야곱의 후예인 이스라엘을 죽이려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놀랍고 엄청난 것입니다. 이 아멜렉의 뿌리와 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죽여 하나님의 언약을 폐하고자 하는 세력들로 나타납니다. 그 뿌리를 탐구하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다하여 존귀히, 경외함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추구로서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그 하신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십니다. 사울같은 태도가 예전의 내게 있던 것임을 부인 못합니다. 성경 공부를 안한 것은 아니나, 진정으로 진리의 맥과 흐름을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주 단편적인 이해와 적용을 실용주의적으로 했을 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의 방향을, 그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만이 아니라 재림 또한 언약된 시간표 대로 이루어 집니다. 철저히 그렇게 되어 집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으면 그 날을 구체적으로 예비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 막연한 이해, 그저 신앙적 추구로만 다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예수님처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으로"살고자 하는 결단과 성령님의 지혜, 총명, 지식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순종을 '거역'과 '완고함'이라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믿음없음'과 '완악함'입니다. 동일한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없음은 불순종과 기억하지 못함입니다. 사무엘은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점을 치는 것과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동일 하다고 극단적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영적인 전쟁과 연결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준행하지 못하면 불의의 창수와 바람, 악의 세력에게 문을 열어 주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신앙생활을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생명처럼 존귀히 여기고 순종하고자 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습니다. 말씀 하나를 발견하는 것이 곧 '기름부음'이 되는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의 이유를 이토록 다루는 것은 바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현실과 믿음의 제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그저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는 작은 창수와 바람에도 무너지기 쉽습니다. 제자들이 우리보다 어리석고 믿음이 적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처럼 진정한 환난을 대면한다면 우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수없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그 때의 일들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기시 직전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만큼 '재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깊이 듣고 기억해야 할 복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솔직히 들여다 본다면 그 말씀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그 다시 오실 주님의 말씀과 그 날에 진정으로 '이기는 자', 이기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요구하시는 본질을 깨어 순종하는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3:8,10-13 이 말씀을 자꾸만 다시 읽게 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면류관을 받을 '이기는 자'는 철저히 꺠어 그 '말씀을 지키는 자'(기억하는 자)이며 그 어떤 환난에서도 그 진리와 성령의 능력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을 더욱 굳게 잡지 못하면 베드러 처럼, 제자들처럼 넘어집니다. 그전에 익슥하였던 이런 말씀을 대하며 깨닫는 것은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연약함, 실패들을 탐구하면서 나 자신의 거울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영혼까지 떨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하며 말씀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미6:4,5 진정으로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내야만 하나님의 의와 그 역사, 나라의 길을 알게 된다는 것을 진리의 성령님꼐서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너무나 수없이 이스라엘이 주야로 묵상하는 무수한 말씀과 절기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 구속의 역사이신 어린 양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자기들이 일상에서 수없이 묵상하고 말하던 것이, 행하던 것이 그것인지 믿지 못한 것입니다. "주여, 주여"한다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듯, '재림'을 생각하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으로 예비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주의 재림에 대하여 무수히 말하고 나누지만 진정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과 준비가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재림과 그 예언, 시대의 징조들을 말합니다. 인터넷에 그런 주제들만 검색해도 엄청난 탐구, 글들, 경고가 넘쳐 흐릅니다. '짐승의 표', '세계 정부', '베리 칩', '천제지변, 재난과 분쟁', '기후와 환경의 파괴'.... 그런 것을 보면 두려움이 엄습하고 합니다. 저도 그런 부분에 많은 리서치와 탐구를 주변의 동지들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것일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주의 재림을 갈망하고 징조와 예언들, 성경을 연구하고 심각성을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무언가 예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짐승의 표'를 구체적으로 경고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진리적 실재와 그저 담론과 열망 넘치는 구호, 나눔이 그것이라는 착각을 분명히 분별해내는 영적 안목이 절실합니다. 예수님의 그 날에 대한 예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2-44 그저에 너무나 익히 알던 이 말씀을 다시 기억해 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 '깨어 있음' 이런 말들은 내게 익숙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머리로 안다고 진정으로 깨어 있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철저히 깨어 말씀의 반석위에 서서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기억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경은 그것을 너무나 강하게 요구하심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한 동인(動因)입니다. 그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진정한 자세와 본질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원합니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에 내 생각이 아닌 손이 저절로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도 일단은 셈세하게 다듬고 연구하기 보다 일단은 손에서 나오는 대로 무작정 쓰고자 합니다. 거칠고 반복되는 부분들이 많으나 그 핵심을 만지시기를 바랍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제가 먼저 더 깨닫고 주 앞에 서기를 소망하여 정리하는 것입니다. 갈 길이 머니 함께 응원하지요.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