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가 목자라하여 따라오라고 합니다. 맞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그런 생각 별로 해본적은 없지만 내가 목자라면 지금 상황은 최악이지요.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고 하는데 권리보다 의무가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오늘 제가 본 청년은 2명이군요. 아버지를 따라와 힘들게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경자매, 직장에서 밤을 새고 뒤에 와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회장.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어렵게 와서 기도하는 몇 사람이 무거운 어깨에 다시 힘을 실어줍니다. 기도하면서 상민자매가 나와 우리 청년과 무슨관계가 있을까 생각난 것을 적어봅니다.
우상민 부회장의 아픔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교회는 한 몸입니다. 청년들은 한 지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끈끈히 연결된 한 몸둥이입니다. 그런데 우리 지체의 한 부분이 아프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한 지체가 잘라질지도 모릅니다. 이 지체는 우리 손으로 한 위치를 위임한 두뇌와 같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지체가 병들어 아프다면 우리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이 아퍼 병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퍼해야 당연합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는 중증입니다. 병은 몸이 이겨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명이 결정됩니다. 상민 자매가 회복되지 못한다면 우리 지체는 그 병에 의하여 오염되어 또 한 부분이 병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위기가 닥쳐올 것입니다. 차례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좋은 피를 수혈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중 그래도 건강한 부분들이 맑은 피 거룩한 피를, 강한 면역체를 아픈 곳에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건강해져야 합니다. 그 건강은 각자가 나를 돌아보며 기도하고 자신의 병든 부분을 제거하는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상민자매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청년. 그 청년만이 병든 곳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누구때문에 이 일이 있어났냐고 묻지 맙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함이니까요.
제가 왜 이리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또하나를 말씀드리죠.
제가 고 2때였나요. 제 친한 친구의 동생이 급성 폐렴이 걸렸었습니다. 거의 죽게되어 희망이 없었죠. 그래 어린 나이에 무엇인가 하여야한다는 생각에 그 친구와 기도원 동굴에 올라가 하루 철야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 뜨겁게도 확신도 가지지 못한 기도 후 얼마 후에 하반신이 마비되어 가는 친구 동생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춥다는 그 아이의 소리에 제 잠바를 덮어 주었고 얼마 후 그의 싸늘히 식어있는 육체를 보았습니다. 그 계기로 내 친구는 교회에 신앙에 소흘하게 되었죠.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사시에 통과하여 연수원 수석으로 판사가 되었고 지금은 변호사로 있는 그 친구. 그에게 신앙으로 귀의할 것을 말할 때마다 그 때 그 생각이 다시 되살아 오르곤 합니다. 저는 더이상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의 지체이기에 나의 생명을 걸 각오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괴롭게 합시다. 마구 떼를 써봅시다. 예수님도 어떤 과부의 간청을 이야기하며 아무리 악한 재판관이라도 떼쓰는 여인 앞에서는 당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쟎습니까. 하물며 우리 사랑이 주님은 어떠 하겠습니까? 예배 때마다 기도제목을 쓴 헌금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제목이 있는한 내가 있는 예배에서는 상민자매의 기도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도 그 기도제목을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귀챦게 합시다. 한시도 이 기도제목에 눈을 못돌리게 합시다. 하나님 보기에 건방지고 불경건하게 느껴질찌라도 그렇게 합시다.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